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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잡는 과학]프로파일러가 찍은 핫스팟에 ‘연쇄 절도범’ 나타났다

입력
2017.07.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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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주도한 야간절도 수십건

화ㆍ금요일 새벽 시간 주로 범행

지리프로파일링 기법 동원

시간대ㆍ주택 침입 방법 등 분석

추석연휴 초기 범행 지역서 잠복

“나타나다” 추격전 끝에 범인 검거

지난해 5월 28일 경기 의정부시 가능동 주택가.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채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이진주(49ㆍ가명)씨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공포를 느꼈다. 열린 부엌 창문, 있어야 할 방충망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젯밤에도 멀쩡했는데. ‘혹시 바람이 불어 떨어졌나’ 떨어져나간 자리를 유심히 들여다봤지만 외부에서 힘이 가해진 자국이 뚜렷했다. 누군가 힘껏 뜯어낸 흔적이었다.

2층이라고는 하지만, 반지하방을 1층으로 쓰고 있는 집 구조상 180㎝가 조금 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부엌 방충망을 뜯어내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열린 창문으로 도둑이 들어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리저리 살피던 이씨는 112로 전화를 걸었다. “옷방에 따로 뒀던 가방 안 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신고를 받은 의정부경찰서는 난감했다. 이씨뿐 아니라 ‘새벽 주거침입 절도’ 신고가 이미 가능동 일대에서만 수십 건 접수됐기 때문. 수사팀은 ‘동일 범인에 의한 연쇄 절도’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감(感)을 뒷받침할 과학(증거)은 없었다. 이씨 신고는 경찰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범인은 얄미울 정도로 용의주도했다. 흔적은 남겼지만, ‘침입이 있었다’는 것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현장을 이 잡듯 뒤져봐도 지문은 고사하고, 머리카락 한 올 나오지 않았다. 족적이 몇 개 나왔지만, 비교 대상이 없으니 범인 검거엔 무용지물이었다.

오래된 주택이 몰려 있는 가능동 일대는 방범용 폐쇄회로(CC)TV를 제외하면 사설 CCTV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방범용 CCTV에 딱 두 번, ‘두건’을 쓴 사람이 찍히긴 했다. 충분히 범인으로 의심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방범용 CCTV가 있는 것을 보고 바로 뒤로 내빼거나, 방향을 틀어버리는 통에 화면은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수준에 턱없이 모자랐다.

범인 행방이 오리무중이자 주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집도 언제 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동네를 뒤덮었다. 급기야 긴급 반상회가 열렸고, 자체적으로 ‘우리 집 지키기’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의정부경찰서는 한낱 절도범을 잡기 위해 살인 등 강력범죄를 전담하는 팀 전체(6개)를 투입하기로 했다.

경찰은 일단 이씨 사건을 포함, 2015년 말부터 2016년 7월 말까지 새벽 시간대에 발생한 유사 사건을 모두 추렸다. 모두 15건. 물론 범인을 잡을 수 있는 단서는 하나같이 확보된 게 없는 난제였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처했다. 그때 정화수(42) 의정부경찰서 강력3팀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지리프로파일링을 이용해 보면 어떨까요?” 지리프로파일링은 범죄 발생 장소 및 시간 등을 중심으로 범인이 머무는 곳이나, 다음 범행 지역을 예상하는 과학수사기법. 평소 과학수사에 관심이 많던 정 팀장은 지리프로파일링이 단서 하나 남기지 않은 신출귀몰 범인을 잡는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내친 김에 침입절도 사건들이 벌어졌던 시간과 장소를 목록으로 만들어 경기북부경찰청 과학수사계로 보냈다.

프로파일러 김성혜(36) 경사가 목록을 받았다. 사건을 훑어본 김 경사는 우선 동일범 소행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범행 지역과 시간, 주택 침입 방법 등 수법을 분석하고, 범행 후 범인이 보이는 특이한 행동 흔적(시그니처)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예컨대 동일범이라면 특정 요일과 시간대에 범행을 하고, 성공한 뒤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싱크대에 버리고 가는 등 일종의 반복 행위들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별다른 시그니처가 없었다. 지문조차 남기지 않는 범인 아닌가. 다만 범행 시간대가 유독 김 경사 눈에 들어왔다. 주택 침입 절도는 보통 낮에 빈집 대상이 많은 반면, 이번 절도는 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는 밤 시간에 벌어졌다. 게다가 주로 화요일과 금요일에 사건이 집중됐다. 불특정 다수가 제각각 벌인 범행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동일범 확률이 높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지리프로파일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먼저 ‘범인이 범행 장소 가능동 근처에 살고 있을 가능성’을 따져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가장 잘 아는 곳이 범죄를 하기에도 제일 편한 장소라는 게 경험으로 축적한 ‘상식’이다.

김 경사는 15건 중 지역을 굳이 나눌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까이서 발생한 것을 뺀 12곳 범행 현장에서 가장 거리가 먼 장소 두 곳을 이어 둥글게 원(지름 680m)을 그렸다. 김 경사는 이를 ‘범행원’이라 불렀다. 범죄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연쇄 범죄에 있어 범행원 안에 주거지나 직장 등 범인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가 있을 확률은 80% 이상에 달한다.

다음 작업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범행원 안에서, 범인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장소를 최소한 범위로 좁혀내야 했다. 김 경사는 네 번째 절도가 일어났던 곳, 그 근처를 지목했다. “범죄자도 범행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생각을 하기 마련”이라며 “집이나 직장 등 거점에서 가장 짧은 최소거리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중심 거점이 바로 네 번째 범행지”라고 설명했다.

김 경사는 곧장 정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범인은 네 번째 범행장소 주변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정 팀장은 바로 절도 전과자를 추려나갔다. 이 정도 연쇄 절도라면, 전과자일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의선상에 오른 전과자는 모두 7명. 범인 검거가 눈 앞으로 다가온 듯 했다. 하지만 경찰서로 나와 조사를 받은 7명은 절도가 벌어진 시간에 각자 알리바이를 내미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김 경사는 잠시 맥이 풀렸다. 다만 그에겐 회심의 카드가 한 장 남아 있었다. ‘다음 범행장소를 예측해본다면, 미리 가서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먼저 가능동 일대 범죄가 많이 일어난 지역을 지도에 표시해나갔다. 그는 이를 “범죄 다발지, ‘핫스팟(Hot Spot)’ 분석”이라고 했다. 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곳(핫스팟) 인근에서 다음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분석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도 곳곳이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김 경사 눈이 번쩍 뜨였다. 붉게 물든 핫스팟 세 곳과 가능동 절도 범행 밀집 지역 세 곳이 정확히 일치했다. 범행 다발지역, 즉 범죄에 취약한 장소를 골라 절도 행각을 벌여왔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김 경사가 도출해 놓은 핫스팟 중 한 곳에서는 아직 절도가 발생하지 않았다. 마지막 범죄인 12번째와 직전 11번째 범죄가 있었던 곳 ‘바로 옆’. 그 곳이 유력한 다음 범행장소였다.

김 경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팀장님,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우선 아직 범행이 발생하지 않은 핫스팟에 범인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고요. 그리고…” 김 경사는 말끝을 흐렸다. 정 팀장은 답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리고 뭐요?” 김 경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리고. 그곳에 범인이 나타날 가능성은 크긴 한데, 왠지 이번엔 초기에 범행을 많이 한 곳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같아요. ”

분석대로라면 범인은 아직 범행이 일어나지 않은 핫스팟 지역 내 집을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김 경사가 외면할 수 없었던, 눈에 거슬리는 게 몇 가지 있었다. 그곳이 의정부경찰서 바로 옆이라는 점. ‘경찰서 옆이라 범인이 그곳을 의도적으로 지나치고 다른 곳을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었다. CCTV에 잡힌 범인 행적은 혹시나 하는 김 경사 의심에 설득력을 높였다. 범인이 마지막 범행(12번째)을 저지른 뒤, 김 경사가 찍은 초기 범행지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찍힌 것이다. “혹시 그 쪽이 도망가기 좋은 곳이지 않을까요?”

정 팀장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가능동은 지하철 1호선(가능역) 철로와 교외선 철로로 둘러싸여 있다. 철길을 따라 뻗어있는 담을 넘어 다닐 게 아니라면, 100여m 간격으로 있는 교차로로 도망갈 공산이 높았다. 김 경사가 찍은 그곳에는 마침 교차로가 하나 있었다. “다시 나타난다면, 범행을 저지르고 곧바로 도망칠 수 있는 교차로가 가까이 있는 그곳이 맞을 것이다. ” 정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은 잠복작전에 돌입했다. 날짜는 주로 범죄가 일어난 화요일 금요일이면서 추석 기간인 9월 2일, 6일, 9일로 정했다. 잠복 구역은 김 경사가 도출해 준 핫스팟 지역 4곳. 정 팀장은 고민할 것도 없이 “김 경사가 점 찍은 그 지역으로 가겠다”고 했다. 정 팀장은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나타나라. 나타나라.’ 도주로로 추정되는 철길 쪽도 모두 봉쇄해뒀다.

9월 9일. 잠복 작전 마지막 날. 오전 2시부터 숨어있었지만 3시간이 지나도록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전 5시30분. 평소라면 철수 준비를 해야 했는데, 이날 따라 형사과장은 대기 명령을 내렸다. “잠복 예정 마지막 날이고 해도 일찍 뜨니 오늘은 7시까지 기다려보자. ”

잠복 연장 지시가 형사들에게 무전으로 전파된 직후, 오전 5시55분. 갑자기 무전기 너머로 정 팀장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나타났다! 나타났습니다!” 추격전이 벌어졌다. 한 주택 담을 넘으려던 범인은 경찰이 있다는 걸 알자 도망가기 시작했다. 범인이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퇴로가 막힌 곳은, 최초 발견 지점에서 100m 떨어진 곳. 공교롭게도 ‘네 번째 범행지역’ 근처였다.

범인은 당시 복면을 쓰고 덧신을 신고 있었지만 경찰이 볼 수 없을 때 다 벗어버리고 체포되자 “나를 왜 잡냐”고 화를 냈다. “친구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시민일 뿐”이라고 항변했다. 자신이 용의자와 동일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대라고도 했다. 그 동안 CCTV를 교묘히 피해 다녔지만, 막상 형사들에게 쫓겨 달아나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CCTV를 신경 쓰지 못했다. 쓰고 있던 복면과 덧신을 버리는 장면이 고스란히 화면에 기록된 것이다.

범인은 61세 남성, 강모씨로 밝혀졌다. 강씨는 경찰서에 와서도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이 주변 정황과 증거로 압박하자 “최근 5, 6건은 내가 한 게 맞다”고 인정할 뿐이었다. 그는 강도상해 등 전과 15범이었다. 나이와 전과가 쌓이면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워지자 다시 절도에 나선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검거 열흘 후 스스로 털어놓은 사건을 포함, 가능동 연쇄 절도 총 23건에 대한 피의자(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상습절도 혐의)로 강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의정부=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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