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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단, 표절이 부끄러운 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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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단, 표절이 부끄러운 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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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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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에 드디어 문단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견 소설가 이순원(58)씨가 표절에 대한 문제제기를 외면해 온 문단권력 카르텔을 인정하며 작가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보내왔다.

세월호의 '가만있으라' 격렬하게 비난하던 출판사가

표절이다 말하는 자에게 '가만있으라…'

신경숙이 아닌 신인작가가 의혹 당사자라면

지금처럼 말할 수 있겠나

벌써 20여년 전의 일이다.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은 ‘떠난 혼을 부르다’라는 작품이었는데, 신문에 실린 다음 오정희 선생의 작품을 표절한 게 드러나 당선이 취소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이걸 잡아내지 못했다. 나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걸 느끼지 못했다. 명백하게 똑같다면 금방 알 텐데 눈 밝은 독자들과 응모자들이 항의하자 세계일보는 오정희 선생에게 작품에 대한 의견을 묻고 이 의견을 바탕으로 심사위원들이 다시 모여 당선취소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그 시절 한국문단이 표절에 엄격했는가? 오히려 그 반대였다. 1992년 한국문단을 표절문제로 술렁이게 했던 작품이 몇 개 있다. 그 해 작가세계문학상 제1회 수상작인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한두 구절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식이었다. 당연히 표절시비가 벌어졌고, 작가 스스로 그 늪을 헤쳐 나오며 만들어낸 말이 ‘혼성모방’이다. 책을 낸 출판사 역시 한 배를 탄 운명으로 힘을 더했다.

만약 그게 심사 중에 불거진 논란이었다면 작품 곳곳에 그토록 많은 표절 의혹을 가진 작품을 새로 시작하는 문학상의 제1회 수상작으로 선택할 출판사도 없고 심사위원들도 없었을 것이다. 같은 1992년 장정일은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표절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그러나 이런 문제제기를 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역시 그런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대형 의혹들이 유야무야 끝난 다음 남의 작품을 자기 창작품인 것처럼 끌어와서도 누가 문제를 제기하면 ‘절대 표절 아니다. 인용을 밝히지 않은 실수다. 이걸 표절로 몰고 가는 사람들의 단세포적 의식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며 적반하장 식 대응이 나왔다. 그 책을 펴낸 출판사 역시 작가를 엄호하며 문제제기자를 ‘문단사회 부적응자’ 수준으로 몰고 갔다. 이런 작품들이 이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는 이번 신경숙씨의 표절에 대한 이응준씨의 문제제기를 백번 공감하고 지지한다. 그 글에 표현된 그대로 그동안 한국문단에 신경숙만큼 많이 또 자주 표절 시비가 있었던 작가도 드물 것이다. 이토록 표절 시비가 잦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게 변방에 우짖는 새 소리로 정도로 그치고 문학판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응준씨도 출판권력이 만들어낸 ‘침묵의 카르텔’에 대해서 말했지만, 또 한겹의 카르텔이 있다. 한국문단의 고질적 문제로 ‘문단 보험 카르텔’과도 같은 출판시스템이 존재한다. 나들이에서 서울 부산 대구를 찍듯 문지 창비 문학동네에 차례로 돌아가며 책을 내니까 문단권력과도 같은 출판사가 작가를 호위하고 엄호하며 표절문제를 은폐해 버린다. 거기에 얹혀 있는 평론가들의 상습적 외면도 침묵에 일조했다.

한국 출판권력이 문제를 은폐해온 방식이 놀랍게도 ‘세월호 방식’과 똑같다. 바로 ‘가만 있으라’이다. 가만있지 않고 말하면 너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것이다, 대놓고 협박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압박해왔던 것이다.

그러면 10년 전과 지금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10여년 전엔 한국 출판권력들이 그걸 은폐하려면 얼마든지 은폐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이슈화할 수 있는 신문이 몇 개 되지 않았고, 또 문학기자들과의 면식을 통해 알음알음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지금은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각종 포털사이트의 블로그와 카페, 거기에 한번 문제가 터지면 인터넷에 수십 개의 새로운 기사가 경쟁하듯 올라온다. 표절에 시효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언제든 이슈화 될 때마다 현재성을 갖는다.

이응준씨의 문제제기 이후 신경숙씨는 “오래 전 ‘금각사’ 외엔 읽어본 적 없는 작가로 해당 작품 ‘우국’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거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박근혜의 유체이탈 화법’을 넘어서 ‘안 읽고도 다 베껴쓸 수 있는 초절정의 유체이탈 독서법’이란 말인가. 그러나 표절은 해당 작품의 문제 부분이 얼마나 비슷하며 영향을 받았는가를 따지는 것이지, 그걸 읽었네 안 읽었네, 독서 알리바이로 따지는 게 아니다.

신경숙의 표절에 대한 창비의 궤변은 더 기가 막힌다. 창비는 “인용 장면들은 두 작품 공히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몇몇 문장에서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를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문장 자체나 앞뒤 맥락을 고려해 굳이 따진다면 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음악과 결부된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는 해괴한 주장까지 펼친다.

해명이라고 읽어보니 신경숙이 잘못한 게 아니라 먼저 ‘우국’을 쓴 미시마 유키오가 잘못을 해도 많이 잘못한 거 같다. 신경숙 작가의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는데 이 무엄한 일본 작가가 미래에 신경숙이 쓸 묘사를 수십년 앞서 남의 보리밭 짓밟아놓듯 미리 망쳐놓은 거라는 얘기가 아닌가? 이 정도 궤변이면 옛날 황제 앞에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던 한나라의 십상시들을 넘어서는 대한민국 문학판의 십상시들이 아닌가. 이게 표절이 아니면 대체 어떤 것이 표절인가? 만약 ‘전설’이 신경숙이 아니라 어느 신인작가에 의해 쓰여지고, 그것이 어느 해 창비문학상 신인상에 응모되었다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표절 의혹을 받는다면 그 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박근혜의 유체이탈 화법을 조롱하던 당신들, 세월호의 ‘가만 있으라’를 격렬하게 비난하던 당신들, 그런 당신들이 당신들 출판사에서 나온 책 문제에 이르면 그 사람들보다 더 지독한 화법으로 지금도 여전히 그걸 말하는 자에게 불이익이 돌아가니 ‘가만 있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게 지금 당신들이 가만 있으란다고 가만 있어질 일인가.

신경숙의 반응과 창비의 해괴한 변명으로 처음보다 문제가 더 커졌다. 사과의 시간도 너무 지나면 놓친다. 이제는 창비 출판부가 아니라 백낙청 선생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백낙청 선생도 저 변명과 같은 생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참에 한국문단의 고질적인 표절들, 좀 부끄러운 줄 알고 사라졌으면 좋겠다. 표절에 대한 기준과 잣대도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취소시켰던 기준대로, 또 지금 신인작가들 등단작품에 대해 적용하고 있는 잣대대로 가져갔으면 좋겠다. 누구에게 특별히 엄격한 잣대가 아니라 문학작품의 표절 판단의 가장 기본적 기준이다.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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