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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틱터 오디세이] 자기복제는 없다, 천의 얼굴 천우희

입력
2016.05.2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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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현지시간) 천우희가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곡성'의 기자회견을 앞두고 사진기자들 앞에서 크게 웃음 짓고 있다. 칸=AFP 연합뉴스
지난 18일(현지시간) 천우희가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곡성'의 기자회견을 앞두고 사진기자들 앞에서 크게 웃음 짓고 있다. 칸=AFP 연합뉴스

영화 ‘마더’(2009)로 대중의 눈에 처음 들어왔다. 2004년 ‘신부수업’에서 깻잎무리2라는 이름도 없는 배역으로 데뷔한 지 5년 만이었다. ‘마더’에서의 역할은 불량한 여고생 미나였다. 동네 건달 진태(진구)의 애인이면서 진태의 덜 떨어진 친구 도준(원빈)이 흠모하는 대상이었다. 진태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구구단을 외던 유별난 인물의 얼굴까지 기억할 관객은 많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저 그런 역할을 한 배우가 있었다는 정도로 그를 소비했다.

그는 독립영화 ‘이파네마에서 온 소년’(2010)의 조연을 거쳐 ‘써니’를 통해 상업영화로 돌아왔다. 한동안 그의 이력을 대표한 이 영화에서 그는 본드걸(‘007’의 본드걸이 아님)이라는 별칭을 지닌 불량소녀 상미를 연기했다. 역할의 비중이 커서라기보다 736만명 가량이 본 흥행작이라 그의 대표작이 됐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고, 흥행도 맛보았지만 그의 이름에는 스타 대신 무명이라는 수식이 앞섰다. 시작은 미약했고, 성장 과정은 험난했다. 하지만 데뷔 10여년 만에 그는 충무로에서 가장 빛나는 젊은 배우 중 한 명이 됐다. 영화 ‘곡성’의 흥행몰이(영화진흥위원회 집계 24일 기준 468만1,584명)에 힘을 보태고 있는 천우희(29)는 남다른 성장 과정을 통해 주연 자리에 오른 매우 드문 배우다.

천우희는 영화 '한공주'로 배우로서의 도약대를 마련한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천우희는 영화 '한공주'로 배우로서의 도약대를 마련한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10년을 돌고 돌아 얻어낸 주연 자리

독립영화 ‘한공주’(2014)가 도약대였다. 천우희는 동갑내기 청소년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인데도 도망치고 숨어 살아야 하는 여고생 한공주를 연기하며 영화인과 관객 눈을 사로잡았다. 체념한 듯하면서도 삶의 희망을 놓고 싶지 않은 한공주의 벼랑 끝 삶은 천우희의 몸을 빌려 스크린에 투영됐다. 무표정한 얼굴로 냉소를 뿜어내면서도 가수라는 꿈 앞에서 설레는 눈빛을 보며 관객들은 한공주의 아픔을 헤아렸다.

‘한공주’는 세계 최대 독립영화 잔치인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천우희도 각종 트로피 수집에 나섰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과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올해의 영화상 여우주연상,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 등 웬만한 영화상의 여우주연상은 그의 몫이었다. 독립영화 주연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한공주’의 완성도와 천우희의 연기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한공주’에서 발휘된 천우희의 진가는 상업영화 출연 계약으로 이어졌다. ‘카트’(2014)와 ‘뷰티 인사이드’ ‘손님’(이상 2015) ‘해어화’(2016) ‘곡성’에서 활약하며 충무로 성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천우희의 출연작을 돌아보면 역할들이 다종다양하다.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노동운동에 눈을 뜨는 ‘N포세대’ 미진(‘카트’)을 연기하다가도 외딴 마을의 의문투성이 무당 미숙(‘손님’)을 표현했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외모가 변하는 기이한 유전자를 지닌 한 남성의 어느 날 모습(‘뷰티 인사이드)을 맡아 한효주와 키스하는 장면을 빚어내기도 했고, 194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가수를 꿈꾸는 기생 서연희(‘해어화’)를 연기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반복하며 소진하지 않고, 무채색의 얼굴로 다채로운 연기를 펼치며 배우로서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천우희는 '해어화'에서 일제강점기 기생 출신 가수를 연기하며 연기의 폭을 넓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천우희는 '해어화'에서 일제강점기 기생 출신 가수를 연기하며 연기의 폭을 넓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천우희는 '곡성'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여인 무명을 연기했다.
천우희는 '곡성'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여인 무명을 연기했다.

외모지상주의를 돌파한 충무로 돌연변이

단역이 조연을 거쳐 주연으로 발돋움하는 성공 스토리는 충무로에서 흔하다. 황정민도 유해진도 정재영도 작은 역할로 시작해 충무로의 큰 별이 됐다. 하지만 천우희의 배우 성장기를 이들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한국 영화계에선 여자배우들에게 외모지상주의가 가혹하게 적용된다. 영화사들은 여자배우의 연기보다 얼굴을 앞세워 캐스팅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연기력을 인정 받은 배우도 외모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주연 자리를 꿰찰 수 있다. 남자배우들에게는 관대하고 여자배우들에게는 엄격한, 기이한 시장 논리가 극장가를 지배한다.

천우희의 얼굴은 외모를 무기로 내세운 배우 지망생들이 숱하게 피고 지는 충무로에서 남다르다 할 수 없다. 한 영화제작자는 “천우희는 한국영화계의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며 “‘한공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도 이렇게 성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남들과 다른 외모가 개성이 됐고, 10년 넘게 다진 연기력이 무기가 됐다. ‘곡성’에서의 무명은 천우희의 경쟁력을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 출연 분량만 따지면 조연급이라 할 수 있으나 그는 무게감만으로도 주연의 역할을 해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명은 ‘곡성’의 무게중심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어느 시골마을에서 귀신인지 신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존재로 등장해 의문과 공포와 신비를 더한다.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목숨이 걸린 선택을 해야 하는 주인공 종구(곽도원)에게 무명이 던지는 “흔들리지 말어”라는 한마디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축한다. 평범하면서도 단호한 얼굴이 품은 결기가 대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씨는 “‘곡성’은 배우 천우희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해준다”며 “그는 잠재력이 매우 크고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고 평가했다. 오씨는 “천우희는 작품을 할 때마다 준비를 많이 하는 배우”라며 “맡은 역할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진화하는 장점을 지녔다”고 덧붙였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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