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ㆍ고교 교과서 11종에 수록
발행사ㆍ저자에 수정ㆍ보완 권한
교육부 “신중히 접근할 사안”
고은 시인이 후배 문인들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휩싸이면서 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을 빼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도덕성 논란을 일으킨 인사의 작품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인데, 한 쪽에서는 사생활 문제와 학문적 성과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적지 않아 교육 당국도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중ㆍ고교 교과서에 수록된 고 시인의 작품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권한은 정부에 없다. 국어 교과서가 기본적으로 검정도서여서다. 정부가 편찬과 배포, 저작권을 모두 갖는 국정교과서와 달리 검정교과서는 민간출판사가 펴낸 뒤 검정 심사를 거쳐 확정돼 수정ㆍ보완 권한이 발행사와 저자들에게 있다. 교육부에는 승인 권한만 있다.
21일 교육부에 따르면 현재 고 시인의 작품은 중ㆍ고교 교과서 11종에 등장한다. 비상교육이 내놓은 중학교 국어④ 교과서에 시 ‘그 꽃’, 고교는 상문연구사와 미래엔, 창비 등 8개 출판사의 문학 및 독서와 문법 교과서에 ‘선제리 아낙네들’ ‘머슴 대길이’ ‘어떤 기쁨’(이상 시) ‘내 인생의 책들(수필)’ 등이 실려 있다. ‘선제리 아낙네들’은 201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지문으로 출제되기도 했다. 올해 고교 1학년이 쓰는 새 국어교과서 중에도 출판사 2곳이 순간의 꽃과 고 시인 관련 내용을 언급한 다른 작가의 수필을 수록했다.
현재로선 그의 작품을 삭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성폭력 가해자의 작품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교육적 가치에 부합하겠느냐는 비판이다. 대전 한 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김모(41) 교사는 “교육에서는 수용자의 태도 역시 교수법의 중요한 판단 척도”라며 “성추행이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문학계 일각에서는 저자의 개인적 문제로 작품 자체의 성과를 깎아내려서는 곤란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문학평론가 A씨는 “문학적 완성도에 대한 고려 없이 단지 도덕성을 잣대로 시인의 작품을 읽을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게 올바른 해법인지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실제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진 서정주 시인의 작품도 국정 체제에서 빠졌다가 검정 체제 전환 뒤 다시 실렸다.
교육부 교과서정책과 관계자는 “(고 시인 작품과 관련한) 저작자의 수정ㆍ보완 요청이 들어오면 승인 여부를 검토하겠다”면서도 “교과서 작품 수정은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전문적 판단에 근거해 신중히 접근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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