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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서와 함께 울고 웃었던 순간 4

입력
2016.08.2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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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고 힘든 시절 국민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었으니 저는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2012년 네이버 캐스트 인터뷰에서)

‘막둥이’라 불리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가 90세를 일기로 27일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배삼룡, 곽규석, 이기동, 남철, 남성남 등과 함께 1960~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끈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암울했던 시기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웃음으로 위로했다.

1926년 평양에서 출생한 고인은 19살이던 1945년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 형제가 이끌던 태평양 가극단에 합류, 아코디언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연예계에 입문했다. 어느 날 공연을 앞두고 잠적한 배우를 대신해 무대에 올라 즉흥 연기를 한 뒤로 희극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1952년 KBS 라디오 방송 ‘홀쭉이와 길쭉이’를 시작으로 방송으로도 발을 넓혀 ‘안녕하십니까 구봉서입니다’ ‘막둥이 가요만보’ ‘7대 코미디쇼’ 등 여러 프로그램에서 이름을 알렸다. 1969년부터 1985년까지 15년 8개월간 방송된 MBC ‘웃으면 복이 와요’는 고인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이다.

고인은 4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이기도 했다. 1956년 ‘애정파도’로 영화계에 데뷔해 ‘오부자’(1958) ‘벼락부자’(1961) ‘굳세어라 금순아’(1962) ‘맹진사댁 경사’(1962)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수학여행’(1969) 등 여러 대표작을 남겼다. 4형제 중 막내로 역할로 출연한 ‘오부자’의 인기로 고인에게 ‘막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인은 2000년 MBC 코미디언 부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2006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에서 연예예술발전상, 2013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의 찰리 채플린, 영원한 막둥이, 구봉서를 떠나 보내며 고인과 함께 울고 웃었던 순간들을 돌아봤다.

코미디언 오재미(왼쪽)와 임하룡(가운데)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이름 콩트를 패러디 한 장면. 유튜브 영상 캡처
코미디언 오재미(왼쪽)와 임하룡(가운데)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이름 콩트를 패러디 한 장면. 유튜브 영상 캡처

세상에서 가장 긴 유행어의 탄생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드셀라 구름 위 허리케인에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유행어의 저작권자가 바로 구봉서다.

구봉서는 ‘웃으면 복이 와요’의 한 콩트에서 무려 72글자에 달하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길지도 모를 유행어를 창시했다. 극중 자손이 귀한 양반집에 외아들이 태어나자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수와 관련된 온갖 단어들을 갖다 붙이면서 만들어진 이름이 바로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이하 생략)’다. 단, 상황이 급하다고 이름을 줄여서 부르면 되려 수명이 줄어든다는 설정이 웃음의 핵심. 이 콩트는 아이의 이름이 너무 길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뤄 당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후에도 이 유행어는 임하룡 등 후배 코미디언들에 의해 수 차례 패러디 됐다. 마치 랩을 하듯 맛깔스럽게 읊어지는 리듬감이 재미를 준다.

하지만 너무 길다 보니 정확하게 외워서 구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2014년 KBS1 ‘아침마당’에 출연한 구봉서도 “당시 애드리브로 만들어진 것이라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며 껄껄 웃음 짓기도 했다.

‘웃으면 복이 와요’의 ‘구첨지 상경기’ 콩트의 한 장면. 유튜브 영상 캡처
‘웃으면 복이 와요’의 ‘구첨지 상경기’ 콩트의 한 장면. 유튜브 영상 캡처
1986년 ‘천하한마당’의 ‘데릴사위’ 콩트에 출연한 구봉서(왼쪽)과 배연정. 유튜브 영상 캡처
1986년 ‘천하한마당’의 ‘데릴사위’ 콩트에 출연한 구봉서(왼쪽)과 배연정. 유튜브 영상 캡처

세태 풍자로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지금은 많이 개선됐지만 과거에는 코미디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구봉서가 활동하던 시절 코미디언들은 대중적 인기가 높았음에도 사회적으로는 홀대 받았다. 코미디에 대한 제재도 심했다. 그럼에도 구봉서는 당시 초등학생들 사이에 존경하는 인물로 꼽힐 만큼 영향력이 컸다.

사회적 약자들의 애환을 풀어낸 채플린의 페이소스 어린 코미디를 좋아했던 구봉서는 사람을 단순히 웃기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가 있는 코미디를 추구했다. 직접적인 사회 비판 대신 코미디로 세태를 풍자했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해 했던 군사정권은 저속하다는 이유를 들어 직간접적으로 코미디를 탄압했다. 하지만 구봉서는 쉽게 굽히지 않았다. 그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마주한 술자리에서 “이제는 못 뵐 것 같다. 나라에서 코미디를 못하게 하니 별 수가 없다”며 항의했던 일화를 2012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소개하기도 했다.

구봉서는 은퇴할 때도 코미디의 풍자 정신을 강조하며 “코미디가 사회 정화 역할을 하지 못하면 의미와 역할이 퇴색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구봉서는 전장의 공포 속에서도 웃음을 선사하는 부대원 봉구 역을 맡아 탄탄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구봉서는 전장의 공포 속에서도 웃음을 선사하는 부대원 봉구 역을 맡아 탄탄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구봉서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수학여행’은 당시 테헤란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구봉서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수학여행’은 당시 테헤란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재평가 받아야 할 정극 연기

영화 ‘막둥이’로 인기를 끈 구봉서는 1960년대 희극영화 붐이 일면서 주가를 더 높였다. 4~5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당시 구봉서가 희극영화에만 출연했던 건 아니다. 한국영화 역사에 기록된 여러 명작들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탄탄한 정극 연기로 1966년 대일영화상 특별상, 1967년 백마상 특별연기상, 1968년 남도영화제 희극배우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이만희 감독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그의 연기력이 빛을 발한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담아낸 이 영화에서 전우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부대원 봉구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봉구가 전사하면서 남긴 유언은 이 영화의 대표적인 명대사다. “내가 몇 놈이나 죽였을까? 아마 내가 쏜 총엔 한 놈도 안 죽었을 거야. 총질이 서투르니까 말이야. 내가 재미있게 말하면 너희들은 웃었지. 슬플 때도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슬프지.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

유현목 감독의 영화 ‘수학여행’에서는 주인공으로 열연했다. 뭍으로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아이들을 위해 수학여행을 계획한 헌신적인 선생님 역할이었다. 부모들을 설득하고 갯지렁이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 어렵게 떠난 서울 여행에서 온갖 해프닝을 겪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유쾌하면서도 뭉클하게 그려진다. 당시 이 영화는 테헤란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희극배우가 주연이라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B급 판정을 받았다. 코미디에 대한 당시의 사회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영화배우로서 구봉서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봉서(왼쪽)와 배삼룡은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호흡을 맞추며 당대 최고의 명콤비로 사랑 받았다. 유튜브 영상 캡처
구봉서(왼쪽)와 배삼룡은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호흡을 맞추며 당대 최고의 명콤비로 사랑 받았다. 유튜브 영상 캡처

평생의 콤비 배삼룡 곁으로

구봉서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고 배삼룡이다. ‘막둥이’ 구봉서와 ‘비실이’ 배삼룡은 오랜 벗이자 콤비로 평생을 함께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1946년 서울의 한 극장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전쟁 때 군인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해주는 군예대에서도 함께 복무했다. 이후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본격적으로 손발을 맞추며 당대 최고의 명콤비로 이름을 날렸다. 두 사람은 한국 코미디 1세대를 대표하는 쌍두마차다. 2002년에도 이들은 악극 ‘나그네 설움’와 ‘그때 그 쑈를 아십니까’를 무대에 올리며 코미디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 배삼룡이 병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09년 뇌출혈 수술을 받은 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구봉서는 아쉽게도 동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지 못했다.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 구봉서가 배삼룡의 병문안을 갔던 게 두 사람의 생전 마지막 만남이었다. 당시 구봉서는 오래 병환을 앓아 고생하는 배삼룡의 모습에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6년 뒤 구봉서도 평생의 동지 곁으로 떠났다. 각계각층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제4회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부산의 공연장에선 전유성과 김준호, 김대희 등 후배 코미디언들이 마련한 약식 추모 행사도 열렸다.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집행위원회는 “개막 행사에서 송해 선생님의 송화봉송을 보면서 내년에는 구봉서 선생님을 모시고자 하는 소망을 품었는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며 “큰 별이 지다라는 표현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슬프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제4회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부산에서 코미디언들이 27일 별세한 구봉서를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제공
제4회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부산에서 코미디언들이 27일 별세한 구봉서를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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