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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도시 피렌체, 가엾은 어린꽃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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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도시 피렌체, 가엾은 어린꽃들의 무덤

입력
2015.04.0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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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갈 데 없는 소녀들의 쉼터서 14년간 526명 중 324명 사망

加역사학자 추적 민낯 드러나

메디치家 사윗감 성 능력 검증에

성병 환자 처녀 치료 대상으로 견직물 공장서 중노동하다 사라져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 니콜라스 터프스트라 지음ㆍ임병철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436쪽ㆍ2만원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 니콜라스 터프스트라 지음ㆍ임병철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436쪽ㆍ2만원

절망, 미스터리, 그리고 많은 비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를 이런 단어로 서술한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만하다.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노동자와 예술가와 천재들이 몰려들어 북적북적 활기가 넘쳤던 그때 그곳에 그런 어둠이 있었을 리가.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은 법이니 그럴 수도 있으려니 짐작할 수는 있겠다.

캐나다 역사학자 니콜라스 터프스트라(토론토대 교수)가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에서 추적한 당시 피렌체 실상은 훨씬 충격적이다. 꽃의 도시 피렌체가 가장 빛나던 시기의 감춰진 진실을 미시사적 접근으로 파헤치고 있다. 전체를 조망할 때 나타나는 스펙터클 대신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특정 지점에 집중해서 생생한 장면을 들춰냈다.

고아가 됐거나 버림받은 어린 소녀들을 수용하던 보호시설의 이야기다. 1544년 피렌체에서 가장 열악한 동네에 설립된 자선쉼터 ‘피에타의 집(연민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적했다. 공식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 “이야기는 절망과 하나의 미스터리, 그리고 수많은 비밀과 함께 시작한다.“ (제1장 첫 문장)

거리로 내몰릴 처지의 어린 소녀들을 보호하겠다는 설립 취지는 좋았다. 피에타의 집은 다양한 배경을 지닌 수십 명의 여성이 노력한 끝에 문을 열었다. 그런데 처음 14년 동안 그곳에 들어온 526명의 소녀들 가운데 202명만 살아 남았다. 입소한 지 몇 달 안돼서, 혹은 몇 주도 안 돼서 죽은 소녀가 수두룩했다. 떼죽음이 따로 없다. 무슨 곡절일까.

미스터리를 추적하다가 마주치는 것은 고통과 분노, 눈물이다. 1584년 피에타의 집에 있던 열여섯 살 소녀 줄리아가 겪은 일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은 맏딸의 결혼 상대로 만토바 공작을 택하면서 사윗감의 성 능력을 확인하는 데 줄리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줄리아는 겁탈 당한 뒤 대가를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두 가문이 합의해서 이뤄진 만토바 공의 성 능력 증명은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됐고 교황까지 개입했는데 당일 제3자가 침실에 입회해 직접 확인했다. 르네상스기 피렌체의 몰염치한 성의 정치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남자는 자랑스레 떠벌렸고 줄리아는 임신했다. 줄리아는 ‘울었다’는 한 줄 기록으로 남았을 뿐이다.

16세기 피렌체는 문예부흥과 함께 견직물산업이 발달했다.
16세기 피렌체는 문예부흥과 함께 견직물산업이 발달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 몫이었던 누에 기르기를 묘사한 얀 판 데르 스트라트의 판화다.
당시 여성노동자들 몫이었던 누에 기르기를 묘사한 얀 판 데르 스트라트의 판화다.

보호시설에 들어와 있는 가엾은 소녀를 동물 교배시키듯 아무 거리낌없이 이용한 이 사건은 피에타 소녀들이 겪은 끔찍한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그 배경에는 여성의 육체와 성을 주변화하고 대상한 르네상스인들의 인식이 깔려 있다. 성병에 걸린 남자가 처녀와 성관계를 하면 낫는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고, 처녀 치료에 가장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게 피에타 소녀였다. 공공연하게 성 착취가 이뤄졌다. 피에타의 집이 구입한 약제 목록에 낙태약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그게 전부가 아니다. 피에타 소녀들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환경에서 비롯된 피부병 등 질병에 시달렸다. 그곳은 공장이기도 했다. 피에타 소녀들은 자신들의 쉼터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기부금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피에타의 집은 노동집약적인 견직물 제조공장으로 변모해갔다. 당시 견직물 산업은 이탈리아의 경제구조를 뒤바꿔 놓을 만큼 성장세에 있었다. 열 살을 갓 넘긴 어린 소녀들이 종일 물레 앞에 앉아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았다. 소녀들은 가장 싼 노동력이었다. 중노동은 사람을 잡아먹었다.

인권 유린과 아동 학대에 해당되는 만행이 자선시설에서 대놓고 일어난 데는 당시 종교와 권력의 합작이 있다. 피에타의 집은 가톨릭교단의 관리 아래 들어가면서 수녀원처럼 변해갔고, 권력은 섬유제조업 전략에 이용했다. 관리하기 쉬운 폐쇄적 공간은 꽤 쓸모가 있어서 나중에는 성의 정치학을 위한 대행업소이자 견사 생산 공장으로 탈바꿈했다. 수많은 줄리아가 거기 있었음은 물론이다.

원서 제목은 ‘사라진 소녀들’이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중노동과 성병에 관련된 가설이 있지만 대부분 추측이고 근거가 약하기 때문이다. 관련 자료는 드문 데다 일부 남아 있는 기록은 종교지도자들이 가공한 것이어서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그에 따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저자는 왜곡된 사료의 행간을 읽고 파편화한 단서를 그러모아 실체를 더듬었다.

행간 읽기를 저자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 읽는 것”이라고 썼다. 피에타 소녀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일부러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친절을 공식적인 역사는 베푼 적이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가 나섰다. 입증 자료의 한계 때문에 개연성을 넘어 역사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는 해석까지 검토하면서,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동안 놀라움과 좌절감을 겪으면서, 피에타 소녀들의 비극을 환기시켰다.

400년 전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읽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어판 서문에 저자는 이렇게 썼다. “이것은 국가와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는 이야기다. 또한 그것은 곤경에 처한 타인에 대한 연민과 지적 호기심을 하나로 결합하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다. 호기심, 연민, 그리고 인간성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출현한 가장 특징적인 인간적 가치로 간주되는 것들이다”라고. 결국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줄리아는 우리 곁에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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