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장’신치용(60) 삼성화재 감독에게 17일 낮술을 청했다. 지난 1일 V리그 챔피언 결정전을 끝낸 뒤 3일간 끙끙 앓았다는 신 감독은 이제 막 머리 속에 꽉 찼던 고민을 내려 놓았다. 1995년부터 삼성화재의 지휘봉을 잡은 그는 참 오랜만에 졌다. 2005년부터 현대캐피탈에 두 시즌 연속 패한 이후로 내리 7시즌 연속 우승 반지를 수집했지만 지난 시즌 제자 김세진(40) OK저축은행 감독에게 무릎 꿇었다. “느낀 바가 많았다”는 신 감독은 한 잔의 술로 지난 7개월 동안 못다한 얘기를 털어냈다. 이하 일문일답.
-최근 위로주를 많이 마셨나.
=오늘 아침 사우나에 갔는데 어르신들의 배구 해설이 시작됐다. “그렇게 우승을 많이 했는데 한번은 져야 다른 사람들도 먹고 살지”라는 말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위로를 해준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다.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것이 가장 편하다.
-오랜만에 졌다. 감독으로서 올 시즌 전후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 같다.
=강연에 가서도 할 말이 많이 생겼다. 강단에 서서 ‘챔피언이었으면 여러분이 날 더 우러러 보겠지만, 나는 오히려 할 수 있는 말이 더 많아졌다’고 얘기했다.
-챔프전 패배가 억울할 것 같기도 하다. 삼성화재도 빈틈 없이 준비했겠지만 OK저축은행이 정말 잘했던 것도 있는데.
=내가 우리 것을 다 보여준 뒤에 실패했으면 어쩔 수 없다고 하겠다. 준우승한 것도 괜찮다. 하지만 결과 떠나서 ‘이 따위’ 시합 밖에 못한 것은 너무 상처로 남아있다. 아직도 그 경기를 생각하면 정말 스트레스를 받는다.
-본격적으로 최태웅, 김세진 등 신치용의 제자들이 감독 자리에 올랐다. 한편으로 제자들은 신치용의 지도 방식에 이견이 있는 듯 하다.
=선수 시절 그들을 강하게 통제한 것에 대한 불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었다. 지금도 매일 밤 10시30분이 되면 선수들의 핸드폰을 걷는다. 선수 통제가 아니라 선수 보호다. 다음날 훈련에서 부상 당하지 말고 충분히 쉬라는 의미다. 탄산 음료 먹지 마라, 간식은 고구마와 달걀만 먹어라? 그렇게 시키면 선수들이 날 싫어한다는 사실 알지만 그게 내 일이다.
-감독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는데,‘포스트 신치용’시대가 왔다고 생각하나.
=스스로 내려가는 감독은 아무도 없다. 세월이 날 밀어낼 때까지 끝까지 할 것이다. 다음시즌도 반드시 이길 것이다. 다만 OK저축은행과 경기하면서 전투력이 안 생겼던 게 사실이다. 상대 감독에게 이기려고 악을 써야 하는데 김세진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제자와 싸운다는 게….
-OK저축은행이 삼성화재를 이긴 것에 대해 배구팬들은 OK저축은행에‘고맙다’라고 한다더라.
=삼성화재에 응어리 진 사람 많다. 나 때문에 서른 명 이상의 감독이 갈렸다. 선수 생활 하면서 우승 못하고 은퇴한 사람이 태반이다. 삼성화재에 대한 악감정이 큰 것 다 안다. 하지만 아무리 나를 욕해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당연히 그들은 나를 욕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자리에서 내려가지 않기 위해 정말 억세게 살았다.
-배구인으로서는 배구계의 세대교체에 찬성하는 입장인가.
=당연하다. ‘배구를 망하게 하는 1번은 신치용’이라는 말 듣는다. 많은 감독들이 우승을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 하지만 나도 그 노력에 조금도 안 뒤지려고 정말 애를 쓴다. 내가 얼마나 지독하게 노력하는 지 우리 마누라만 안다. 배구팬들이 몰라줘도 난 섭섭하지 않다. 평가는 나중에 받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욕을 많이 먹고 나면 지혜도 생긴다(웃음). 그렇다고 내가 도둑질을 했나. 열심히 한 죄, 우승한 죄 밖에 없다.
-김상우, 최태웅, 신진식, 김세진, 박철우 중 애제자는 누구인가.
=애제자는 없다. 그래도 꼽자면 신영철 감독을 꼽겠다. 한국전력 코치 시절부터 데리고 와서 평생을 함께한 정이 있다.
-신치용에게 ‘청출어람’은 지난 시즌과 다음 시즌의 키워드가 될 것 같다. 신치용에게 청출어람이란?
=그냥 좋은 경쟁상대라고 생각한다. 청출어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은 없다. 오늘 아침 목욕탕에서 “제자한테 지니까 좋으냐”는 말 들었는데 결코 좋지 않다.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제자 밀어주는 것 아니냐’라는 소리다. 난 정정당당하게 승부에만 신경 쓸 것이다.
이현주기자 memor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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