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씨
목적 뚜렷한 그림 그려왔기에
이젠 쓸모 없는 것이 그리고 싶어져
내 안의 것을 솔직하게 내 놓으면
소통은 저절로 될 것이라고 생각
모든 예술은 현재를 위한 것이다. 현재가 예술을 통해서 풍성해지고, 현재의 의미가 소중해지고, 동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미래를 위한 예술이란 없다. 미래를 위한 예술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기꾼일 확률이 높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예술, 재테크가 되는 예술, 미래를 보장해주는 예술이란 없다. 예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오직 현재만 생각한다. 현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놀이에 전념하듯 예술가들은 현재라는 바다에 잠수해서 들어간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작품을 다룬 다큐멘터리 ‘조르조 모란디의 먼지’(마리오 체멜레가 감독)에는 이런 질문과 대답이 나온다. 누군가 조르조 모란디에게 물었다. “화상이 당신의 그림을 30만 리라에 사서 다음날 300만 리라에 팔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까?” 조르조 모란디는 덤덤하게 이렇게 대꾸했다.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나는 화가이고 그 사람은 상인이다.” 조르조 모란디가 자신의 돈 270만 리라에 집착하는 순간 그의 예술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예술을 하는 데 돈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돈은 부차적인 것일 뿐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고지식한 의견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돈이 끼어드는 순간 마음은 조금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목적이 생기는 순간, 가야 할 곳이 보이는 순간,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고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돈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다. 돈을 위해 글을 쓰다가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낸 도스토옙스키의 명언도 생각난다. “문학은 돈이 아닐지 모르지만 원고는 확실히 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는 원고가 문학으로 탈바꿈된 행복한 경우일 것이다. 어렵고 예민하고 미묘한 문제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원고’를 온전한 ‘문학’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씨를 만나러 간 것은 이런 미묘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는 생계가 불가능한 작가다. 하루 종일 소설만 쓰고 싶지만 (정말이다! 소설 쓰는 건 엄청나게 재미있는 일이다!) 다른 일도 해야 한다. 대부분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고, 의미도 있고 수입도 좋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일이므로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러다가 모든 ‘원고’가 그냥 ‘원고’인 채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일러스트레이터는 클라이언트의 주문에 의해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누군가 주문을 했을 때 예술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강훈씨의 균형 감각이 궁금했다. 이강훈씨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질문을 던졌더니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모든 예술가들은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강훈씨는 일러스트레이트 작업을 하다가 누군가 주문한 그림이 아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예술병’에 걸렸다고 했지만, 내 생각엔 그는 이미 예전부터 예술병에 걸려 있었고, 조금 다른 예술병에 다시 걸린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용어로 설명해보자면 예전에는 모든 원고가 문학인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날 어떤 원고가 문학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때부터 질문이 시작된다.
“일이 너무 많았고, 일을 하는 시간을 빼면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오히려 글을 쓰고 싶었어요. 요즘에는 좀 달라졌죠. 목적이 뚜렷한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아무런 목적이 없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어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그림이 아닌, 쓸모 없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어요.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쓸모 없는 것의 쓸모에 대해서 고민하는 그림이랄까요. 의미 있는 것들이 너무 많고 다들 의미를 찾으려고 하니까요. 소통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고 있어요. 어쩌면 소통을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소통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부러 소통하려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내 안의 것들을 솔직하게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소통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어요.”
이강훈씨의 요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아니, 자유롭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솔직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정확히 표현한 감정의 찰나라고 해야 할까, 마음의 적나라한 골격을 해부하는 것 같다고 말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서로 마주하는 얼굴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일제히 소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역시 언어로는 선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강훈씨의 고민과 질문이 이런 선들을 만들어낸 것은 확실하다.
이강훈씨는 20개월째 ‘데일리 드로잉’을 하고 있다. 데일리 드로잉이란 매일 그림을 그린다는 뜻이고, 매일 어떤 형상을 바라본다는 것이고, 매일 어떤 방식으로든 선을 긋고 있다는 이야기다. 질문만 하고 대답을 미루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질문과 대답을 동시에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강훈씨는 후자에 가깝다. 그는 질문하면서 계속 대답하고, 대답에서 다시 질문을 찾아낸다. 그가 데일리 드로잉과 함께 하는 일은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을 많이 그렸고, 사람을 자주 관찰했다.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란, 그에게 자신의 선을 찾는 작업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어쨌든 동물이잖아요. 저는 사람을 동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는 것 같아요. 개개인의 사람에 대해서 개인적인 관심은 있지만 그림에서 그걸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이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모습들,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형태가 저한테는 중요해요. 사람을 그리면서 어떤 형태가 다른 형태와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해가는 거예요. 제가 지금 그리고 있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포르투갈 작가인 페르난도 페소아의 문장이 생각났다. 페르난도 페소아는 자신이 허구로 만들어낸 작가 ‘베르나르도 소아레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인간과 동물 모두,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로 내던져지고, 짬짬이 즐거운 일들을 누리며, 날마다 똑같은 생물학적 필요에 따라 행동한다. 둘 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살아가는 것 이상으로 살지 않는다. 고양이는 햇볕에서 뒹굴 거리고 나서 잠을 자러 간다. 사람은 삶에서 뒹굴 거리고 나서 잠을 자러 간다. 둘 다, 본성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이강훈씨가 그리고 싶었던 마음의 적나라한 골격을 문장으로 번역한다면 이런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가야 하고, 살 수밖에 없다. 고양이에게나 우리에게나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고양이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미래를 걱정하는 고양이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잠을 잘 리가 없다! 인간에게도 미래를 걱정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현재를 통째로 갖다 바칠 수는 없다. 우리는 좀더 많이 예술에 전념해야 한다.
문제는 다시 돈이다.
2013년, 이강훈씨는 ‘월간 윤종신’의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다. ‘재능 있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를 발굴하고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함께 하기로 했다.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다. 제안을 받는 입장과 제안을 하는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거짓말로 하는 제안을 하고 싶지 않았고, 서로의 마음이 움직이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작가의 입장을 알고 있으니 훨씬 설득력 있고 믿음직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이고,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프로젝트도 구상 중이다.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지만 작가가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일을 할 수는 없을지 고민하고 있다. 재능을 소모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는 데일리 드로잉 작품을 자신의 SNS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으며, 여전히 인간을 관찰하고 있다. 어쩌면 이강훈씨는 돈과 예술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걸어갈 수 있는 튼튼한 외줄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외줄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제가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도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었어요. 앞으로의 일도 불안한데, 불안하면서도 계속 좋은 거죠. 저는 불안한 게 좋아요.”
현재는 불안하고 떨리는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보다 낫지 않냐고 그가 이야기해준 것 같았다. 불안하니까,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고 있으니까, 글을 쓰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면서 함께 떨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 좋지 않냐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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