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 대기업 총수와 오찬때
문화 투자 확대 요청후 설립 준비
작년 예산 확대 시정연설 맞춰
재단 등록 등 일사천리로 진행
올 7월 “엄정 수사” 촉구하자
그날부터 검찰 조사도 본격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미르ㆍK스포츠재단 설립과 관련 박근혜 대통령 지시를 받았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대통령에 대한 수사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과거 대통령의 발언이 주목을 받고 있다. 대통령이 국무회의 등 공식 석상에서 했던 발언이 재단 모금 등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24일 대기업 총수를 불러 청와대 오찬을 가진 박 대통령은 “기업인 여러분이 대한민국 메디치 가문이 돼 주시고 문화예술분야에 투자를 확대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를 미르ㆍK스포츠재단 설립 구상을 밝힌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기업들에게 문화예술인을 후원하던 메디치 가문의 역할 즉 기금을 출연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실제로 재단 설립 준비가 진행됐다. 최순실(60)씨의 측근인 차은택(47)씨는 지난해 4월부터 주변에 ‘정부 일을 같이 하자’고 사람을 모으는 등 미르재단 설립에 착수한 정황이 드러났다. 7월 17일 최씨는 딸 정유라(20)씨와 함께 독일 슈미텐에 미르ㆍK스포츠 등의 자금을 세탁하기 위해 세운 페이퍼컴퍼니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비덱 스포츠’를 설립한다.
같은 달 24일 대기업 총수 17명을 부른 청와대 오찬간담회에서 박 대통령은 “한류 확산을 위해 기업들이 나서 도와줘야 한다. 재단 형태를 만들어 민관 합동으로 지원을 했으면 좋겠다”며 보다 구체적으로 발언했고, 그 직후 7명의 대기업 총수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대통령이 총수들을 일일이 만나 재단 출연과 관련해 직접 얘기했을 가능성이 큰 대목이다.
지난해 8월 4일 국무회의에선 재단 설립 논의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으로 보이는 발언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전통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정체성을 확립ㆍ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리 문화와 전통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재발견하고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후 재단 설립은 본격화했다. 특히, 대통령이 2016년 문화 관련 예산을 확대ㆍ편성한다고 발표한 시정연설이 열린 지난해 10월 27일 직전에는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미르재단 설립이 진행됐다. 10월 26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 보낸 “미르 설립을 위해 반드시 내일 서울팔래스호텔 모임에 참석하라”는 긴급 협조 공문을 받은 기업 임직원들은 해당 호텔에 모여 재단 등록 서류를 작성했다. 재단 설립 허가를 관장하는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은 세종시에서 상경해 바로 문체부 서울사무소에 서류를 등록했다. 27일 오전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문화융성은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신산업을 일으키고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원천”이라며 “문화재정 투자를 전년 대비 7.5% 늘린 6조6,000억원을 배정했다”고 밝힌다. 미르재단은 이날 오후 공식 발족했다.
최씨는 올해 1월 K스포츠가 설립되기 전날 개인회사인 더블루K를 만든다. K스포츠도 6일만에 설립 등기까지 마치는 등 미르와 마찬가지로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세워진다. 한 달 뒤 정현식 전 K스포츠 사무총장은 세무조사를 받고 있던 부영 관계자를 만나 70억~80억원 출연을 요구하고 SK에도 80억원 추가 출연을 요청한다. K스포츠 실무자들은 안 전 수석, 최씨와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공유하고 협의했다.
두 재단과 최씨에 대한 의혹이 불거진 올해 7월 이후 나온 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수사와 관련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9월 22일 박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 자금 유용 등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 받을 것”이라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한다. 그간 미적거리던 검찰은 우연히도 이날 재단 설립 허가를 관장하는 문체부 국장급 관계자들을 소환해 수사를 본격화한다.
지난달 24일 JTBC의 ‘최순실 파일’ 보도 다음날 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최씨에게 “의견을 물은 적은 있다”고 인정했으나 재단에 대해서는 “순수한 의도”였다고 선을 그었다. 최씨는 이틀 뒤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순실 파일’이 기밀인지 몰랐다. 태블릿도 내 것이 아니다”라며 관련 혐의를 부인했다. 이어 지난달 30일 오전 최씨가 전격 귀국한 것도 막후 조율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됐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