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줄곧 진보의 싸가지론을 주장해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강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논의의 겉만 훑은 사람들처럼 자극적인 언행을 일삼는 진보 진영의 품행을 단속하려는 시선이 불편해서가 아니다. 강 교수의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최근 몇 년간 국내에 부쩍 유입된 정치 이론과 개념을 그가 여과 없이 인용하고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우선 2014년으로 돌아가보자. 2014년은 현재 강 교수의 생각을 읽는 데 중요한 해다. 그해 싸가지 없는 진보가 나올 당시, 그의 생각에 보탬이 된 책이 나왔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의 ‘모멸감’과 미국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이다. 특히 올해 2월에 나온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에서 ‘모멸감’은 중요하게 언급된다. 얼핏 제목만 보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두 사람 다 정치와 도덕의 관계 회복을 주장한다. ‘이왕 싸우는 거라면 건설적으로 싸울 수 없을까’라며, 품격과 교양 있는 정쟁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이스하고 젠틀한 개인상을 제시한다. 한데 논의를 자세히 뜯어보면 저자들은 정치와 감정의 연관성 속에서 유독 정치 현상을 ‘자극과 반응’의 틀에서만 생각하려 한다.
강 교수는 이를 참조해 자신이 오랫동안 제기해온 정치의 종교화라는 프레임을 다시 한번 강변한다. 이념과 영웅화된 정치인에 대한 극단적인 몰두를 중단하자고. 백 번 천 번 옳은 이야기다. 하나 그가 보수와 진보를 종교적 은유에 가둘 때 간과하는 지점이 있다. 중도와 부동층이야말로 현실 정치의 새로운 종교적 은유임을.
최근 각광받는 신경정치학 같은 학문은 중도와 부동층의 종교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정치에서 느낌과 감정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은 부동층의 속마음을 보는 실험을 소개하며 정치 성향과 뇌신경을 주목하길 권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견해가 “하룻밤 사랑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연구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정치를 둘러싼 오랜 논의에 뇌라는 요인을 끄집어내느냐의 문제라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본 연구들이 결과를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실험 오락(experitainment)’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치와 관련된 연구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연구자가 설계한 실험 속 둔중한 문제의식보단 흥미로운 사례에 빠지기 쉽다. 특히 관련 연구자들은 주장보단 설계된 실험 속 서사에 치중하면서 또 다른 정치 오락을 부추긴다.
더 나아가 ‘도덕적 뇌’를 중시하는 이런 연구들은 정치를 조화로운 자연으로 그려내고자 애쓴다. 이 사고에 영향을 받은 강 교수는 보수와 진보를 화학조미료로 여긴 채, 양 진영의 열정을 고르게 평준화하자며 소통·조화·중도를 외친다. 그러나 ‘중용을 보더라도 중(中)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중은 다채로운 감정을 응축하고 있지만, 함부로 드러내지 않음을 뜻한다.’(김찬호, 모멸감 중) 고로 싸가지 있는 진보가 지향하는 젠틀한 인간상은 소통 가능성을 위한 대안이기보단, 소통 불가능성을 시인하는 정치적 개인의 아량과 자기도취에 가까워 보인다. 강 교수의 싸가지론은 정치를 도덕적 경관으로 여긴 채, 싱그러운 생태계를 해치지 않을 감정 제어 장치를 대중에게 주문하고 있다.
보수, 진보의 관성을 타개할 조화로운 정치적 포지션과 나이스한 정치적 인간상에 내재된 중도라는 은유가 뒤섞인 ‘싸가지 없는 진보’는 과연 정치적 견해일까. 강 교수가 갖고 온 ‘싸가지 있는 진보’란 유기농 식품은 도리어 우리를 안전한 정치 생태계라는 환상에 빠지게 하는 자극제는 아닐까. 우리는 이제 정치공학의 피로에서 한 발 비껴 ‘정치생태학’과 맞서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 부쩍 어떤 심리 효과와 신드롬에 매몰된 채, 정치를 짜고 달고 매운 속세로만 지켜보는 강 교수가 부디 선인이 되지 않길 바란다.
김신식 김샥샥연구소장ㆍ독립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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