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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안목 중독

입력
2015.10.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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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blow up)’을 다시 보았다. 생각지 못했던 점이 하나 둘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가 안목의 의미를 되묻는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토머스는 인기 사진작가다. 눈으로 먹고 사는 그는 누군가를 볼품인지 아닌지로 정하는 사람이다. 그렇다 보니 늘 자신의 눈에 취해 있다.

시각이 발달된 토머스는 무엇보다 진부함에 예민하다. 상투적인 것을 잡아내고 꾸짖는 게 일인 그에게 웬만한 대상은 자극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량이 남들에 비해 많은 그는 깊이 듣기보단 할 말이 우선적으로 나온다. 그런 삶의 리듬이 오래되어서인지 지쳐 있고 말엔 날이 서 있다.

지친 사람은 남도 지치게 한다. 지친 사람은 그 사실을 부인한다. 외려 자기가 진부함을 가려내니까 지루함을 덜지 않느냐고 자족한다. 허나 안목에 빠져 있는 사람이 진부함을 색출하는 데 의의로 삼는 것은 정작 지루함의 제거가 아니다. 그들은 타인을 노력 유무에 치우친, 게으름으로만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글로 먹고 사는 인생에도 안목은 중요한 능력이다. 나 같은 경우 글도 쓰지만, 잡지를 만들면서 다른 이의 글도 꾸준히 읽는다. 괜찮은 필자를 찾다 보면 글에 대한 평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런 생리를 잘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안쓰러운 신경전이 벌어진다. 대화 가운데 뻔하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여기서 뻔함은 나름의 방어다. 행여 자신이 진부해 보일까 걱정되어 누군가의 질문과 관점에 대뜸 뻔하다 받아 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익히 알다시피’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본다. 실컷 글 쓰거나 말한 뒤 이미 이뤄졌던 논의인가 싶어 습관적으로 서두에 ‘익히 알다시피…’로 표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들에게 ‘익히 알다시피…’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좀처럼 접하지 못했으리란 과욕을 낮추는 겸손이 아니다. 나중에 가서 타인에게 뻔한 사람으로 취급 받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을 신경 쓰는 태도에 가깝다.

안목의 사회적 용법에 의구심을 품지 않으면, 이러한 두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게 된다. 사람들의 표현을 금세 식상함과 그렇지 않음으로 지각하는 감정 구조가 굳어진다. 누군가의 언어를 제대로 들으며 헤아리려는 노력 대신, 세상을 오로지 비범함과 평범함으로만 솎아내는 것을 ‘뛰어난 감각’이라 여기는 착시가 생긴다. 그 구조 속에선 진부한 이로 규정될까 걱정되는 사람들을 통해 자기 감각을 과시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드셀 뿐이다.

이를 ‘안목 중독’이라 부를 수 있다면, 안목 중독의 사회는 각자 나름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이들의 메시지를 곧잘 ‘글러먹음’으로 평가하는 데 스스럼없다. 이러한 태도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니, 안목에 중독된 이들은 높을 대로 높아진 기준에 망설임이 없다. 타인이 왜 아직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지를 ‘용납’의 수준으로 사고한다.

이처럼 안목에 취해 있으면 결국 사람들은 서로를 피로로 대할 뿐이다. ‘욕망’의 토머스처럼 누군가는 몇 초 만에 내게 피곤한지 아닌지로 판가름 나는 대상일 뿐이다. 피곤해서 생긴 자신의 게으름은 스리슬쩍 감추고, 그 혹은 그녀의 삶 속 가능성은 곧잘 서문 몇 쪽에 비유된다. 서문 몇 쪽만 읽어봐도 타인의 삶에 대한 감이 온다며 자신의 피로를 남에게 전가한다.

오늘날 안목은 ‘사람 볼 줄 아네’라는 기존의 의미 대신 ‘피로 볼 줄 아네’가 되어버렸다. 안목이 나의 피로를 덜어주면서 누군가의 싹수를 효율적으로 보는 기술에만 머물 때, 승자와 패자라는 구도는 편안하게 다가온다. 안목이 싹수 자체를 ‘만드는’ 기술이 될 순 없을까. 그런 생각에 머뭇거리는 사이 안목 중독의 압박에 시달리는 이들은 예전보다 더욱더 진부함을 사회적 스트레스로 맞이하고 있다.

김신식 감정사회학도ㆍ‘말과활’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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