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킹’으로 9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배우 조인성이 ‘흥행 열차’에 올라탔다. ‘더 킹’은 개봉 4일째인 21일 누적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1,000만 영화인 ‘변호인’과 ‘국제시장’,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 방의 선물’과 비슷한 흥행 속도다.
‘더 킹’은 무소불위 권력을 꿈꾸는 검사 박태수(조인성)가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해온 권력 실세 한강식(정우성)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전직 대통령들의 실명을 그대로 등장시키며 한국 현대 정치사를 관통한다.
조인성은 정치 검사로서 승승장구하다 결국 몰락의 길을 걷는 박태수의 일대기를 힘 있게 그려낸다. 어느새 그의 연기에 관록과 노련미가 담기기 시작했다. 스크린 9년 공백도 말끔하게 지워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영화배우’ 조인성이 반가워서, 스크린 속 그의 옛 얼굴을 찾아봤다.
‘쌍화점’(2008)
‘쌍화점’은 ‘더 킹’ 이전 조인성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었다. ‘비열한 거리’의 유하 감독과 이 영화에서 다시 만난 조인성은 과감한 연기 변신을 보여준다.
영화는 고려 왕(주진모)과 그의 호위무사 홍림(조인성), 왕비(송지효)의 애증관계를 그린다. 왕과 동성 연인 사이인 홍림은 후사문제로 원나라의 위협을 받게 된 왕의 명령으로 왕비와 억지로 합궁을 하게 된 뒤 왕비와 격정적 사랑에 빠진다. 둘 사이를 알게 된 왕은 홍림을 궁에서 내쫓고 홍림은 왕에게 칼을 겨눈다. 왕과 왕비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 그 둘 모두에 마음을 준 홍림은 양성애자인 셈인데, 개봉 당시엔 상당히 파격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조인성은 처음 출연하는 사극 장르에서 화려한 무술과 섬세한 감정 연기는 물론, 표현 수위가 꽤 높은 정사 장면도 소화했다. 주진모와의 키스신 같은 동성애 묘사는 특히 주목을 받았다. 배우로서 수행 과제가 많은 작품이었지만 조인성은 자신의 한계에 기꺼이 도전했다.
이 영화는 조인성을 비롯한 꽃미남 호위무사 군단으로도 화제가 됐는데, 단역으로 출연한 송중기와 홍종현, 임주환, 노민우, 현우의 앳된 얼굴도 만날 수 있다.
‘비열한 거리’(2006)
모델로 데뷔해 MBC 시트콤 ‘논스톱2’와 SBS 드라마 ‘별을 쏘다’, ‘발리에서 생긴 일’ 등에 출연하며 청춘 스타로 인기를 끌던 조인성은 영화 ‘비열한 거리’를 통해 배우의 얼굴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열연은 충무로 제작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삼류 폭력조직 2인자 병두(조인성)의 욕망과 몰락을 그린 액션 누아르 영화다. 날마다 생계를 걱정하면서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던 병두는 조직의 스폰서인 황회장(천호진)과 손잡은 뒤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런 병두 앞에 영화감독이 된 동창 민호(남궁민)가 찾아오고, 민호는 병두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영화를 만든다. 이 일로 인해 병두의 삶은 다시 꼬여만 간다. 영화는 서로 필요에 의해 얽히고 설킨 먹이사슬 관계를 들여다보며 인간의 비열한 욕망과 그 욕망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하 감독은 귀공자 이미지를 가진 조인성에게서 거친 얼굴을 끄집어냈다. 조인성은 ‘멋’을 버리고 ‘연기’를 택했다. 삼류 인생을 살아온 남자를 보여주기 위해 눈빛부터 벼렸다. 살벌한 육탄전과 비명이 절로 나오는 핏빛 칼부림 등 액션 장면은 다시 봐도 놀랍다.
영화에는 조인성이 노래방에서 ‘땡벌’을 부르는 장면이 담겼는데, 영화 개봉 후 이 장면이 화제가 되면서 ‘땡벌’이 크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로 인해 오랜 무명에서 벗어난 가수 강진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될 만큼 유명하다.
‘클래식’(2003)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 주기를….”
그룹 자전거 탄 풍경의 노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 흘러나오면 자동 연상되는 아름다운 장면이 있다. 영화 ‘클래식’에서 서로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은 남녀주인공이 겉옷을 둘러쓰고 함께 빗속을 달려가던 장면이다. 첫 사랑의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져 빙그레 웃음 짓게 된다. 이 장면 안에 조인성이 있다.
‘클래식’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담았다. 30여년 전 신분과 환경의 차이로 이뤄지지 못한 주희(손예진)과 준하(조승우)의 사랑은 시간이 흘러 그들의 자녀인 지혜(손예진)와 상민(조인성)에게로 이어진다. 조승우와 손예진이 연기한 과거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이긴 하지만, 조인성과 손예진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도 꽤 흥미진진하다.
조인성은 지혜가 짝사랑하는 대학 연극부 선배 상민으로 등장한다. 매점 주인(임예진)도 흠모할 만큼 캠퍼스 최고의 킹카다. 조인성의 ‘잘생김’이 폭발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연기는 조금 어설펐다. 그의 연기에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마들렌’(2003)
‘클래식’에서 조인성의 출연 분량이 적어서 아쉽다면 ‘마들렌’을 보면 된다. 20대 초반 풋풋하고 싱그럽고 열정적인 조인성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조인성은 소설가를 꿈꾸는 대학생 지석을 연기한다. 책 100권을 다 읽을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은 지석은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미용실에 갔다가 헤어 디자이너가 된 중학교 동창 희진(신민아)를 만난다. 지석은 당당하고 솔직한 희진에게 끌리고, 희진 역시 순수한 지석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렇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희진의 제안으로 한 달 계약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지석 앞에 그의 첫 사랑 성혜(박정아)가 나타나고, 지석과 희진의 애매모호한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청춘 로맨스로 흘러가던 영화는 희진의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해 결이 달라진다. 다소 뜬금없는 전개이긴 하지만, 지석이 더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야기의 완성도는 아쉬워도 눈을 즐겁게 하는 조인성과 신민아의 옛 모습이 위안이 된다. 두 배우의 미모가 ‘열일’을 한다.
이 영화엔 뜻밖의 ‘깨알 재미’도 있다. 희진에게 상처를 남긴 옛 남자친구로 하정우가 출연한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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