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중국 청나라의 황금시대 끝자락을 장식한 황제다. 재위 60년 동안 그는 청나라를 요즘 표현으로 ‘팍스 만추리아’로 일궜다. 강희~옹정~건륭 3대 재위 135년(1661~1796)에 걸쳐, 오늘날의 중국 지도가 완성됐다. 후세 사가들은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라고 부른다. 당시 조선 역시 숙종~경종~영조~정조시대를 관통하면서 문치의 기운이 만개하던 때였다.
시진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자들이 ‘중화제국 부흥’을 외칠 때마다 이 3명의 황제가 단골로 등장한다. 복명반청을 부르짖던 한족들에 외면당하던 만주족 황제가 되레 한족들의 후손에 의해 명군으로 추앙 받는 장면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주목되는 것은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ㆍ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는 뜻)으로 칭한 건륭제에게 혼군(昏君)의 이미지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는 말년에 대만의 반란을 평정한 뒤, 바닷길을 봉쇄하는 정책으로 스스로 대륙 속에 갇히는 신세를 자초했다. 만약 청나라가 바닷길을 계속 열었다면 이후의 세계사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황혼기에 접어든 건륭의 총기를 결정적으로 흐리게 한 장본인은 호부상서 화신이었다. 건륭은 화신의 이재능력을 높이 사 청나라의 재정을 맡겼으며, 그를 통해 국고를 채웠다. 화신은 20여 년간 건륭의 비호 아래 원명원 신축 등 각종 국책사업을 진행하면서 나라의 곳간을 제 주머니로 삼았다. 화신은 특히 죄를 지은 자도 그에 상응하는 돈을 내면 죄를 면해주는 이른바 의죄은(議罪銀)제도와 북경성을 드나들 때 통관세를 부과하자는 아이디어를 내 건륭의 윤허를 받아내는 재주를 부렸다. 말하자면 시스템적으로 검은 돈을 챙기는 데 천부적인 수완을 보인 것이다.
화신은 그러나 건륭 사후 불과 하루 만에 탄핵돼, 가경제로부터 자결을 명 받는다. 화신으로부터 몰수한 재산이 무려 8억량이라고 전해지는데 당시 청나라의 1년 예산 4,000만량의 20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화신을 중국사 최대의 탐관오리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대목에서 최태민, 최순실 가계의 국정농단이 겹친다. 최고 권력자의 지원과 묵인 아래 합법적으로 재단을 만들어, 기업들을 협박해 거액을 뜯어내는 수법이 화신의 그것과 닮았다. 국회에서 이들 최씨 일가의 재산 몰수 특별법을 만든다고 하니 기대해 볼 일이다.
하지만 최씨 일가가 대한민국을 통째로 자신들의 이권사업으로 연결시키려고 획책한 데는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청와대 비서실장조차 대통령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는 불통의 리더십이라니. 실제 박 대통령은 지난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불통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장관들을 빤히 쳐다보며 “대면보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집무실에 출근도 하지 않고, 관저에 머물면서 분초를 다투는 국가 현안들에 대해 서면보고만 받았다니 “이게 나라냐”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그런 점에서 강희와 건륭에 비해 저평가된 옹정의 ‘밀주함 리더십’에 새삼 눈길이 간다. 옹정은 가히 ‘일 중독’이라 불릴 정도로 정무와 이치에 매진했다. 특히 지방으로 부임해나가는 고관들에게 노란색 밀주함을 주면서 기탄없이 의견을 올리라고 했다. 밀주함은 특급 송배달 ‘600리 긴급서찰’로 보내져 수일 내에 자금성으로 날아들었고, 옹정은 즉시 주비를 달아 답신을 해줬다. 옹정은 하루 4시간만 자는 열정으로 외신들과 밀주함을 주고 받아 궁중 복도에까지 주비를 단 서신들이 쌓였다고 한다. 수 만리 떨어진 곳에서도 황제와 수시로 직접 소통이 가능해지자, 부정부패는 감히 싹조차 피우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재위 13년 만에 과로로 돌연사했는데 민간에서는 암살설이 떠돌았다.
최근 사퇴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취임하면서 섬김의 리더십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그에게서 섬김의 대상은 오직 박 대통령 한 사람 뿐이었다. 대신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제발 거친 입은 닫고, 밀주함 리더십을 챙겨보기 바란다.
최형철 스포츠부장 hcc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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