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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 /소설 ‘책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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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 /소설 ‘책의 자서전’

입력
2004.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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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자서전’은 책이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소설이다.1999년, 이탈리아 한 도시의 고서점. ‘나’는 책꽂이에 꽂힌 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저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순간. 나는 거의 병이라도 날 것 같다…."

‘나’는 38년 출간된 초판본 소설이다. 그 사이 세 사람의 주인을 만났다 헤어졌고, 화려했던 겉 표지는 닳아 뜯겨진 신세. 신간으로 서점에 깔리던 즈음에는 나름대로 걸작으로 평가 받았고, 시인 단눈치오(1863~1938)가 갑자기 숨지는 바람에 쇼윈도가 추모제단으로 바뀌지만 않았다면 선택된 소수들의 차지인 ‘쇼윈도 데뷔’도 예정됐던 몸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름 휴가 전까지 구세주를 만나지 못할 경우 폐지로 팔려나갈 운명이다. ‘나’의 머리 속에는 영욕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첫 주인이었던 17세 청년이 군에 간 뒤 응접실에서 쫓겨났던 기억, 제대해서 결혼한 주인의 아내가 어루만져주던 짜릿함, 39년을 산 뒤 주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자녀들의 버림을 받고 고물상으로 팔려갔던 일, 독서광이었던 두 번째 주인과의 추억과 시나리오 작가인 세 번째 주인을 만났던 일…. 세 번째 주인의 집에서는 컬러TV를 처음 보기도 했다. 기계문명을 신봉하던 그의 세 번째 주인 덕에 여러 휘황한 문명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점점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듯한 존재적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차례로 주인이 바뀌고, 고물상과 고서점을 전전하는 동안 책꽂이에서 만났던 친구(다른 책)들의 기억도 생생하다. 이웃이던 ‘존 스타인벡’과는 교훈적인 대화를 나누며 시대에 뒤떨어진 어떤 분위기로 서로를 위안했고, 음울하고 끔찍한 공포를 담고 있던 몇몇 젊은 ‘친구’들과 함께 보내며 겪던 불편함도 떠오른다. 하도 인기가 좋아 약간 오만한 듯했던 ‘피노키오’며, 새 주인을 기다리며 ‘절대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의 권태를 극복하는데’ 위안이 돼주던 ‘보물섬’도 생각난다.

‘나’는 극적으로 한 애서가의 책꽂이에 1만번째로 꽂히는 행운을 만나 용케 서점을 떠난다. "잘 있게, 헤밍웨이. 종종 자네 시를 생각하게 될 거야. 그리고 모두들 잘 있어. 상자 속에서 무기력하게 보낸 시간들도 모두 안녕." 그는 풍문으로 떠돌던 몇몇 영웅들처럼 몇 세기를 넘겨 살아 시대의 새로운 바람을 흡수하며 자신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는 꿈에 부푼다.

국내에는 생경한 작가, 안드레아 케르베이커는 실제로 1만2,000여권의 책을 보유한 장서가다. 어느 날 고서점에서 유명 정신분석의사인 체자레 무자티의 장서 2,000권을 불과 100만리라(약 50만원)에 구입하는 행운을 얻지만, 한편으로 비참한 책의 말로에 분개하며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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