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 보수의 가치 보여준 정치인”
“심, 노동자 소수의 권리 일깨워”
‘될 사람 미는’ 사표론 비민주적
소신투표 안 하면 당선돼도 사표
#2
바른정당 탈당사태에 ‘분노의 표’
건강한 보수 있어야 진보도 성장
‘노동이 당당한 나라’ 슬로건 공감
성 소수자 대변 ‘1분 찬스’에 결심
이토록 빛나는 4, 5등이 또 있었을까. “졌지만 이겼다.” “낙선조차 빛났다.” “선거의 격을 높였다.” 유권자들이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 두 사람에게 보내는 갈채다. 선거는 1위가 모든 영예를 거머쥐는 경쟁이지만, 이번 대선의 경우 ‘성공한’ 낙선자들의 존재감이 남다르다. 유승민 후보는 창당 100일을 갓 넘긴 신생 보수정당 후보라는 한계를 딛고 6.8%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심상정 후보는 6석 소수정당의 후보로서 진보정당 사상 최고 득표율인 6.2%를 기록했다.
이들에게 표를 준 이들조차 당선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1~3위 후보들을 찍은 표와는 또 다른 소신 투표다. “심 찍으면 홍이 된다” “유 찍으면 문이 된다”는 압박도 거셌다. 그럼에도 422만명, 13%의 유권자들이 이들에게 표를 던진 이유는 무엇일까. 유승민 지지 표는 말한다. 기득권에 눈 멀지 않은 소신과 상식을 지키는 멋진 보수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심상정 지지 표는 말한다. 노동자와 약자에게 시혜 아닌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 주는 정당이 집권해도 좋지 않느냐고. 유권자들은 입을 모은다. “우리의 한 표는 결코 죽은 표가 아니다.” 이렇게 오늘의 낙선표는 한국 정치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
“이게 진짜 합리적 보수다”
유승민 후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유권자들은 우선 “보수도 고통 받는 국민 편에 설 줄 안다”는 데에 공감했다. 보수라도 기득권층이 전부가 아니라 약자를 품고자 하는 열망이 유권자들에겐 있었던 것이다. 포항에 사는 이재원(49)씨는 “복지공약이나 양극화 해소에 관심은 있었지만, 보수성향은 버리지 못하는 TK지역의 어정쩡한 40대였는데, 유 후보의 언행을 보며 ‘아 이게 진짜 보수의 가치구나’라는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며 “재벌개혁, 양극화 해소, 노무현 전 대통령 재평가를 이야기하고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찍혀 배신자 소리까지 들으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에 반했다”고 했다.
정책적 전문성을 갖춰 따듯한 보수가 말뿐이 아니라는 확신도 심어주었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었던 대학생 이명우(23ㆍ가명)씨는 “사드배치에는 긍정적이면서도 양극화 해소나 복지정책에 관심이 많은 안철수, 유승민 두 후보에게 모두 관심이 있었는데, ‘중성장 중복지’ 공약은 물론 재원마련 계획이 가장 꼼꼼하게 준비된 점이 믿음직했다”고 말했다.
유 후보에 대한 지지는 기성 보수 정당에 대한 냉소와 비판을 반증한다. 자기 이해에 따라 철새처럼 옮기고, 합치고, 쪼개기를 밥 먹듯 하는 기성 정치에 국민은 얼마나 질렸던가. 대조적으로 유 후보는 배신자 프레임 속에서도 소신행보를 지켜왔다. 바른정당 탈당사태는 그래서 더욱 ‘분노의 표’를 불러왔다. 대구 출신의 수도권 유권자 양정민(50)씨는 “유일한 합리적 후보인데도 박근혜 정부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팠는데, 대선 직전 탈당사태까지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분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오히려 바른 정치, 깨끗한 정치를 원하는 다른 국민들이 더 분노하시는 걸 보며 감동받고, 희망도 느꼈어요. 안될 걸 알면서 왜 찍었냐고요? 3, 4달 되는 정당에서 바로 대권을 쥔다면 그게 오히려 로또 아니겠어요. 정치발전의 초석을 닦는 표죠.”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했던 직장맘 한지영(34ㆍ가명)씨는 탈당사태를 목격하고 결심을 했다. “우리사회에 건강한 보수정당이 있어야 보수도 진보도 함께 성장할 수 있잖아요. 바른정당이 제대로 틀을 잡아 상식 따윈 모르는 다른 정당의 대항마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죠.” 대학생 이상민(24)씨는 “유 후보가 계속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고 선거비용 보전이라도 받았으면 싶어서 힘을 실어주었다”며 “전국적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 바른정당이 더 곤경에 처하면 ‘보수진영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할 줄 아는 이런 정치인을 다시는 볼 수 없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탈당사태 직후 팬 카페에는 열흘 만에 2,000여명의 신규회원이 몰렸다. 유 후보의 팬클럽 ‘유심초’의 카페지기 구자태(45)씨는 “과거 새누리당의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함께 나와 바른정당을 세운 분들조차, 자기 정치를 하느라고 후보를 위기에 몰아넣는데 오히려 지지자들의 가입과 응원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느끼고 희망도 봤다”고 했다. 그는 “유 후보를 통해 타성에 젖지 않은 따듯한 보수, 서슬 퍼런 권력에서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보수가 함께 만드는 부끄럽지 않은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노동당당 ‘나중에’ 말고 ‘지금’
심상정 후보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울린 것은 ‘노동이 당당한 나라’라는 슬로건 그 자체다. TV토론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게 “육체노동자는 야근에 휴일에 일하고 도지사만큼 월급 받으면 안 됩니까?”라고 반문한 대목은 많은 이들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밥 먹을 틈도 없이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 서민, 같은 일을 하고도 제값을 못 받는 비정규직, 해고의 불안감에 법적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수많은 취약 노동자들이 얼마나 깊은 설움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는지는 심 후보에게 던져진 표가 증명하고 있다.
충남 지역 유권자인 자유기고가 지유석(45)씨는 “우리 지역만 해도 갑을오토텍 사태 등 노동자들이 핍박당하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참여정부에서조차 노동이 제대로 된 가치를 부여 받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워 심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막판까지 갈등은 많았어요. 심 후보를 지지하면 (정권교체가) 위험하다는 주장들이 많아서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다른 후보 지지 민심을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발언이잖아요. ‘이건 진짜 아니다’ 싶었죠.”
수도권 기혼 남성 회사원 박이섭(36ㆍ가명)씨는 “한국사회가 겪는 병폐의 근원이 노동시장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저임금, 비정규직 등 노동시장 왜곡과 출산율 저하, 부익부빈익빈 등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노동정책이 근본”이라고 했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과, 본인의 노동가치에 당당할 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심 후보와 정의당이 새 정부의 변화를 견인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더 이상 ‘나중’으로 미룰 수는 없다. ‘지금’ 찍어야 했다. 회사원 김주원(36ㆍ가명)씨는 “과거 무상급식 같은 진보정당의 어젠다가 지금은 보편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냐”며 “늘 나중에만 외쳤다면 결코 오지 않았을 오늘”이라고 말했다.
심 후보가 TV토론에서 성소수자를 대변하는데 쓴 ‘1분 찬스’를 보며 결심을 굳혔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회사원 한혜원(26ㆍ가명)씨는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많은 분들이 그 장면에서 결심했다고 본다”며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말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심 후보의 발언에 더욱 이입이 됐다”고 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함께 옳다고 말해주는 데에 가장 근접했던 것이 심 후보였어요. 당선은 어려워도 가시화된 득표율이 앞으로의 원동력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던진 한 표는 심상정이라는 정치인에게, 지금의 그 신념으로 계속, 지지 말고 앞으로도 싸워달라는 당부이자 부탁이니까요.”
내 표는 펄떡펄떡 ‘산 표’
사표론은 유권자들을 흔들지 않았다. 심 후보를 공개 지지한 손아람 작가는 “이번만큼은 작정하고 사표론과 싸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맹목적인 벽, 어둡고 컴컴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괴롭고 고단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늘 내가 행사한 표가 사표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투표를 해왔지만, 세상은 원하는 만큼 바뀌지 않았다”며 “정말로 원하는 가치를 위해 투표하지 않으면, 그 표는 당선이 되어도 사표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라는 글을 남겨 주목 받았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어요. 고시 3관왕, 법대 수석 등의 이력에 흔들리지 않고, 이제는 심 후보 같은 노동운동가에게 공명할 줄 아는 시대, 새로운 가치를 볼 줄 아는 시대가 됐다는 거잖아요.”
회사원 박소진(30ㆍ가명)씨는 “2012년 대선에서 심 후보가 막판에 문재인 후보 지지를 호소하며 사퇴했을 때 문 후보에게 표를 주고도 정권교체에 실패한 충격이 어마어마했다”며 “이후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소신대로 찍는 게 건강한 정치지형을 키우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
이례적인 다섯 후보의 완주는 성과를 남겼다. 두 아이를 둔 직장맘 최아영(35ㆍ가명)씨는 “국민들이 저울질 하고, 후보들 간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여러모로 긍정적이었다”고 했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는 “유 후보와 심 후보는 두루뭉술한 민주ㆍ반민주라는 프레임, 거대 정당들로는 담을 수 없는 유권자의 열망을 대표했다”며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어떤 옳음’이 중요하냐는 고민의 지점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사회가 복잡해지고 유권자의 요구가 다양해지는 시대에, 다양성을 담아낼 제도가 더 절실해졌다”고 덧붙였다.
낙선한 두 후보와 정당에 대한 응원은 계속되고 있다. “선거의 승패에 상관없이 오래가는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다 보면 언젠가 국민들이 알아줄 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지지자도 후보도 지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승패에 상관없이 첫 발을 뗀 기분으로요.“(59세 지형민씨)
이들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실망은커녕 자축하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앞으로 성과는 더욱 빛날 것이라고. 그리고 되뇌고 있다. 굳세어라 유승민. 굳세어라 심상정. 굳세어라 민주주의!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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