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쪽 바다에 있는 섬 가파도의 최고 높이는 20.5m다. 바람이 불 때마다 땅의 3분의 2를 뒤덮은 청보리가 운치 있게 흔들리는 섬이지만, 정작 주민들조차 그 전체를 조망해본 적이 없다. 최근 섬에는 3층 높이의 건물이 들어섰다. 현대카드와 제주특별자치도가 섬 생태계를 복구하기 위해 2012년부터 가동한 ‘가파도 프로젝트’의 하나인 예술가들의 레지던시 ‘가파도 에어(AIRㆍArtist In Residence)’다. 접시처럼 평평한 섬에 잠망경처럼 우뚝 솟은 ‘가파도 에어’는 그 동안 가파도가 몰랐던 경관 하나를 발굴해냈다.
12일 가파도 마을회관에서 열린 가파도 프로젝트 개막식에는 원희룡 제주도지사,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이숙경 런던 테이트모던 아시아미술 큐레이터, 마르티노 스티어리 뉴욕 현대미술관(MOMA) 건축 큐레이터, 최욱 원오원 건축사무소 대표 등이 참석했다.
정 부회장은 “6년 전 아내(정명이 현대카드 브랜드부문장)의 손에 이끌려 가파도를 찾은 게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고민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면 좋겠지만, 아름답다는 이유로 난개발되고 버려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존만 한다는 건 이곳의 삶을 석화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요.”
가파도는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에서 약 6㎞ 위에 있다. ‘최남단’ 타이틀은 관광객 유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을 이장인 김동옥씨에 따르면 “주민들은 마라도로 가는 여객선을 쳐다보고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섬 인구는 170여명. 유일한 학교인 가파도 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7명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본섬으로 ‘유학’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가파도 프로젝트는 일단 섬의 경제생태계를 만드는데 초점을 맞췄다. 가파도의 유일한 ‘야간 업소’가 될 스낵바가 그 중 하나다.
“주민 90% 이상이 어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고 오후 5,6시면 섬 전체의 불이 꺼집니다. 관광객들은 밤에 딱히 할 일이 없어 서둘러 섬을 둘러보고 배 시간에 맞춰 나갈 수 밖에 없어요. 밤에 이곳 스낵바에서 바다를 보며 가파도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음식에 술도 한잔 곁들일 수 있게 했습니다.” 프로젝트 초기부터 섬에서 살다시피 하며 실무를 진행한 현대카드 남궁용 대리의 말이다.
스낵바를 비롯해 새로 생긴 상업시설 운영은 모두 주민들이 맡는다. 수익은 주민협동조합으로 들어가 조합원들이 함께 나눠 갖는다. 가파도 경제의 근간인 어업센터도 새로운 건물로 탈바꿈했다. 어업센터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을 부리는 장소로, 관광객들이 갓 잡은 해산물을 먹으려면 개인적으로 찾아와 사야 했다. 여기에 ‘해녀 화로구이’라는 식당을 만들었다. 해녀와 관광객들이 얼굴 마주보며 식사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물질을 할 수 없는 해녀들이 신선한 조개와 소라, 생선 등을 숯불에 구워 준다. 바로 옆에는 카레와 햄버거 등을 파는 양식당을 만들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가파도의 버려진 집들을 활용해 리모델링한 숙박시설 ‘가파도 하우스’도 6개동을 지었다. 하루 숙박료는 20만원대다. 기존 민박집들과 경쟁 구도를 이루지 않기 위해 고가의 독채 펜션 형태를 취한 것. 지붕 모양, 돌담 형태, 식생까지 마을의 집들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다듬었다.
가장 공을 들인 곳은 예술가 레지던시인 ‘가파도 에어’다. 이곳 역시 20년 간 물에 잠긴 채 방치됐던 건물을 고쳐 만들었다. 작가들 개인 숙소와 작업실, 갤러리, 전망대 등으로 이뤄진 가파도 에어에는 현재 미디어 아티스트 양아치, 영국의 제인&루이스 윌슨 자매 등 국내외 예술가 7명이 입주해있다. 외국 작가는 뉴욕 현대미술관과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선정한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이숙경 런던 테이트모던 큐레이터는 “국제적 예술가들이 아름다운 가파도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하고, 그 작품이 세계 무대로 나올 때 어떤 결과가 있을지 벌써 기대된다”며 “장기적으로 볼 때 가파도 프로젝트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기획”이라고 말했다.
현대카드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가파도 주민들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했지만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해녀 일당이 적게는 20만원에서 많게는 80만원인 곳에서, 주민들을 다른 경제활동에 끌어 들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을 떠났던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마을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정 부회장은 "가파도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저희의 진정성을 믿고 따라준 주민들”이라며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모두 잡으려 한 우리의 시도가 국내 다른 지역에도 일종의 답을 제시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가파도=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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