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농사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 뭐하러 계산하나 물 부으며 살면 되지”

입력
2016.03.11 20:00
0 0

찬 바람이 애쓰지만 성큼 다가온 봄

부지런한 어르신들 감자 다 심었는데

마을보다 느린 나, 게으름 인정할 뿐

작년에 쌀ㆍ콩ㆍ감자 등 심어 팔았지만

농사 잘 지어 남는 장사 한 것도 아냐

알바 일자리가 가계부 부족 메워 줘

올해 수익 계산해 봤자 속만 상해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세상

계획은 무슨, 마음 편하게 살면 되지

前 한국일보 기자 camaragaga@naver.com

어쩌다 보니 봄이다. 꽃이 샘을 부리든, 꽃에 샘을 놓든 그까짓 거 봄이다. 찬 바람이 애써보지만 산수유는 여지 없이 터졌고, 이제 매화도 그리 힘겨워 보이지 않는다. 부지런한 어르신들은 며칠 전 약속한 듯 동시에 밭을 갈더니 벌써 감자를 다 심었단다. 한 두 번 더 있을 추위에 “아이고 감자 싹 올라오는디 다 꼬실라져 뿔겄네” 하시겠지만 “꼬실라져두 날 놈은 다 나” 하는 다른 분의 말씀에 “그건 그려” 하고 넘어가실 터이다.

물통을 빌리러 오봉댁 어머니께 들렀다가 감자 안부를 물었더니 “우린 안즉 밭두 안 갈았어요” 하셨다. 혹시나 하고 여쭤봤는데 대답으로 안심을 시켜주신다. 마을에서 조금은 늦게 심으시는 편이고 우리 집은 그 보다 한참 더 늦는다. 뭐든 그렇다. 하루 일과도 2시간 시차는 나고, 일년 통틀어도 보름씩은 밀린다. 뿌리고 심는 것도 그렇고 캐고 터는 것도 그렇다. 왜 그럴까.

어느 신경생물학자라는 사람이 그랬다. “늘 기분 좋고 행복한 사람은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기 때문에 밤낮 걱정하고 고민하는 사람보다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 내가 그런 부류인가 했지만 생각해보니 아니다. 나는 별로 행복해 하지 않으면서 끈질기지도 않고, 밤낮 걱정하고 고민하면서도 문제 해결능력은 떨어지는 편이다. 남들보다 비교적 뛰어나다 싶은 것은 먹는 능력뿐이다. 결론은 그냥 게으르고 느려터진 습관의 덩어리라고 할 수 밖에 없겠다. 조금 아까 ‘뭐든 그렇다’고 얘기하는 것부터 게으름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요 개선할 생각도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난치병이다.

간전댁할머니가 큰 솥에 찹쌀가루와 질금을 넣고 끓이며 큰 주걱으로 젓는 동안 아내가 대나무를 넣으며 불을 조절하고 있다.
간전댁할머니가 큰 솥에 찹쌀가루와 질금을 넣고 끓이며 큰 주걱으로 젓는 동안 아내가 대나무를 넣으며 불을 조절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뭔가에 대해 “늦어도 그때 꺼정은 해야 써” 하시면, 앞 뒤 다 자르고 ‘그때’만 귀에 쏙 들어온다. 그리고는 ‘그때’를 적기로 판단한다. 그렇게 엊그제 장을 담갔다. “장 담글라믄 음력 정월은 넘기지 말아야 허는디” 하시는 말씀은 들었다. 그래서 잡은 날이 정월 스무 아흐렛날이다. 데드라인을 이틀 앞두고 고추장과 간장을 담갔다. 그것도 간전댁할머니의 도움이 아니면 어려웠을 일이다. 다른 분들은 설 전에 다 마친 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해 놓고도 반성할 줄 모른다. 아내는 “손 없는 날이네” 하며 좋아했다. 할머니도 우리에게 전염되신 걸까. “뱀두 없고 용두 없응게 좋은 날이여” 하셨다. 숫자 큰 달력에 보면 12간지 동물이 날짜마다 표시돼 있는데 그 중에 용이나 뱀이 있는 날은 장 담그기에 안 좋은 날이라고 하셨다. 어쩌다 잡은 날이 그랬던 거고 만약에 안 좋은 날에 걸렸어도 뭔 이유라도 끌어다가 잘 된 일로 만들었을 게 뻔하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을 녹인 물을 붓고 있다. 간전댁 할머니와 오봉댁 어머니가 모든 일을 진두지휘 하신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을 녹인 물을 붓고 있다. 간전댁 할머니와 오봉댁 어머니가 모든 일을 진두지휘 하신다.

어쨌든 마치고 나니 뿌듯했다. 고추랑 숯 띄우고 조릿대 끼워 메주를 누르는 할머니의 손은 매번 아름답다. 항아리 모양도 둥그런 내 몸을 닮은 것 같아 예쁘다. 물 부어 100일만 지나면 된장, 간장이 된다고 생각하니 봉이 김선달 마냥 쉽게 사는 기분이다. 메주를 만들기까지의 징그러운 과정은 이미 다 까먹었다. ‘물 좋다는 샘에 가서 150리터를 길어다 부었는데 간장이 그만큼이고 그걸 다 팔면 경운기 한 대 값도 가능하다. 흐흐’ 생각만 해도 좋다. 헌데 그냥 모자란 생각일 뿐이고, 그러니 흐뭇한 거다. 콩 농사 짓느라 들어간 땀이랑 돈, 메주 쑤다가 생긴 병이랑 약값은 아직 한 푼도 수중에 되돌아 온 것이 없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밑 빠진 독인 줄도 모르고 물만 들입다 부은 짓일 수도 있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을 녹인 물을 부은 뒤 고추와 숯을 띄우고 조릿대를 끼워 넣어 메주를 누른다. 간전댁 할머니와 오봉댁어머니의 손에서 장 맛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을 녹인 물을 부은 뒤 고추와 숯을 띄우고 조릿대를 끼워 넣어 메주를 누른다. 간전댁 할머니와 오봉댁어머니의 손에서 장 맛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을 녹인 물을 부은 뒤 고추와 숯을 띄우고 조릿대를 끼워 넣어 메주를 누른다. 간전댁 할머니의 손에서 장 맛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을 녹인 물을 부은 뒤 고추와 숯을 띄우고 조릿대를 끼워 넣어 메주를 누른다. 간전댁 할머니의 손에서 장 맛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가계부를 열어봤다. 재작년 처음으로 20만원 흑자의 쾌거를 올렸고, 작년에도 그만큼은 남겼다. 그렇다고 올해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농사를 잘 지어서 남는 장사를 한 것이 아니고 아르바이트 일자리가 다행히도 부족을 메워준 거다. 아내는 평소 “작목 수를 확 줄이면 좋겠어. 유헌씨 몸이 감당을 못해요”를 입에 달고 산다. 농사라고 이제 쥐뿔만큼 알면서 실제로 안 하는 거 없다. 작년에도 쌀, 콩, 마늘, 양파, 생강, 울금, 감자, 고구마, 들깨, 무, 배추, 밤, 매실, 단감, 대봉이랑 살았다. 개복숭아, 돌배, 꾸지뽕, 호두나무도 관리했고, 감잎차, 우엉차, 뽕잎차도 만들었다. 간장이랑 된장 고추장도 팔았다. 누가 들으면 돈 좀 번 줄 알겠다. 가계부 끝자락에 농사 수입 총액을 보니 2,000만원이 조금 안 된다. 적지 않은 수입이다. 허나 사실은 순이익이 아니라 매출이다. 종자, 기계, 포장재, 택배비 다 빼고 계산하면 나만 슬퍼질까 봐 농자재 구입을 가계 소비로 넣는다. 그러고는 매출을 마치 수익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산다. 그게 마음이 편하다.

아무래도 소품종 다량 생산은 위험하다. 시장가격 변동이나 풍수재해에도 취약하고, 병이 오면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가뜩이나 약효도 확실하지 않은 걸 만들어 뿌리면서 내 자식들만 튼튼하게 자라길 바라는 건 누가 봐도 욕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감자를 두 박스나 주문했다. 20kg짜리다. 반 박스 아니면 많아야 한 박스 심었는데 금년엔 조금 늘려보기로 했다. 작년에 반응이 좋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욕심이 올라온 것이다. 얼마를 받을 지, 다 팔릴 지 알 수 없다. 이것 저것 따져봐야 기운만 빠진다.

개불알풀꽃이 밭에 한 가득 피어있다. 봄의 전령으로 불리지만 갈아 엎어야할 잡초이다.
개불알풀꽃이 밭에 한 가득 피어있다. 봄의 전령으로 불리지만 갈아 엎어야할 잡초이다.

어제 전화 한 통에 맥이 풀렸다. 무슨 정부 기관을 대행해서 알아 보는 중이라고 고구마에 대해 물었다. “친환경으로 하시는 거 맞죠?” “네” “수익성 조사 중이에요. 몇 평이나 지으셨죠?” 마침 쉬고 있었고 농사일지도 근처에 있어서 모처럼 정부 일 좀 도와주자는 생각으로 착실하게 대답했다. 재배면적과 생산량을 시작으로 모종값부터 택배비까지 자세하게 질문했다. 상대편 여자는 처음에는 아나운서처럼 말하다가 점점 사투리로 변했다. 다 대답하고 나니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라믄 한 30만원 수익 보신거네요” 약간 허탈한 마음에 “그렇게 되나요?” 되물으니 짠하다는 투로 인사를 했다. “애쓰셨구마요.” 내 귀엔 ‘애만 쓰셨네요’로 들렸다.

계획하고 계산한다고 뭐가 나아질까 싶었다. 그렇게 안 하고도 살아 왔고, 그러고도 살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예상해 봤자 모르겠고, 뒤돌아 계산해 봤자 속만 상한 걸 뭐할라고 하나 싶었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다 싶었다. 더 불안했다. 다이어리를 펴고 대강 끄적여 봤다. 올해 심을 작목과 수량, 작년 시세를 기준으로 한 매출을 예상해보고 큰 돈 들어갈 곳과 생활비를 빼 보니 남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살겠다는 전망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익 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는 힘들 듯 하다. 아내가 “돈이 되는 농사 없을까?” 했던 말에 고로쇠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수액이 소주랑 똑 같은 가격으로 팔리는 걸 생각하니 역시 물 장사가 제일 낫다 싶었다. 그러다가 30도 넘는 오르막에 길도 없는 곳으로 물동이 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포기했다. 세상에 쉬운 건 없었다.

잡생각 없애는 데는 일하는 게 최고다. 이장 친구한테 빌린 전동가위를 들고 농장 꼭대기부터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토종 매실이라고 얻어다 심었는데 억센 가시가 자동차 타이어도 빵꾸 낼 정도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결국 엄지 손가락에서 피를 봤다. 살짝 찔린 줄 알았는데 목장갑에 빨간 점이 점점 커졌다. 피가 난다고 더 아파지는 것도 아닌데 화가 치민다. ‘이걸 확’ 하는데 “행님 확 베 부러요!”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D동생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놀래 켰다. 동생을 향해서 ‘이걸 확’ 하는데 눈도 안 마주치고 전화기를 내려보더니 혼자 떠든다. “흐미, 이세돌이 져 부렀네요. 알파고 이누무 자슥이 보통 놈이 아닌 갑네요.”

알파고. 이름부터 맘에 안 들었다. ‘바둑’을 검색해 보면 영어사전에 ‘baduk’도 분명히 있는데 굳이 일본어 ‘고(碁)’를 영어로 써서 이름을 지은 거 아닌가. 그래 놓고는 우리나라에 와서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음식 이름이나 고유명사 빼고 우리 말이 영어로 된 거라고는 화병(火病.hwabyung)이나 재벌(chabol) 같이 안 좋은 것 밖에 없는 건가.

‘인간과 기계’의 대결이 있기 전부터 보통 기계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았을 텐데 지고 나니까 ‘애초에 인간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느니, ‘구글은 바둑인들에게 사과하라’느니 하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기계가 감히 인간을 이겼다는 것에 흥분한 모양새다. 나야 뭐 컴퓨터랑 고스톱을 쳐도 한 번을 못 이기는 판에, 컴퓨터(CPU) 2,000대가 국제적으로 작동한다는 놈이랑 게임 해서 진 게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는다. 바둑이라는 게임이야 어차피 사람끼리 즐기자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단지 사람이 앉아서, 그것도 바둑 유단자라는 사람이 앉아서 기계가 시키는 대로 대신 돌을 놓아주고 있는 모양이 맘에 걸린다. 인간이 기계의 수족을 담당한 셈인데. 그래 놓고는 기계가 이겼다고 ‘달 착륙’이란다. 나는 좀 무섭다.

필자가 약수터에서 장을 담그는데 쓸 물을 담고 있다. 약수터의 상태도 때마다 다르기 때문에 두세 군데에서 물 맛을 보고 물을 결정한다.
필자가 약수터에서 장을 담그는데 쓸 물을 담고 있다. 약수터의 상태도 때마다 다르기 때문에 두세 군데에서 물 맛을 보고 물을 결정한다.

“동생, 이건 인공지능이고 뭐고가 아니라 신이 내려온 거 같아. 저런 식으로 하면 뭘 못하겠나. 걔네가 게임만 하겠어? 주식이나 부동산을 하면 사람만 못하겠나 아니면 사람들 심리를 이용해서 정치를 하라면 못하겠나. 문제는 그런 기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가 아니라는 거지. 이제 끝난 거 아닌가 몰라.” 동생은 싸 들고 온 호박전과 막걸리 한 병을 꺼내며 답했다. “행님, 겁나요? 머가 겁나요. 인간이 빨리 디져야 지구가 건강해져요 행님. 봐요. 요즘 인간덜 하는 짓이 암 덩어리랑 똑같잖애요. 이렇게 막걸리나 묵고 하믄서 착하게 살다 가믄 되는 거제. 이거 잡사 봐요. 호박전 겁나 맛있응게”

동생 말이 맞네. 클라우드 컴퓨팅이 어쩌고 하는 뜬구름 같은 얘기보다 뱀 찾고 용 찾으며 살라네. 밑 빠진 줄 모르고 물 부어도 그냥 살면 되지. 계산은 해서 뭐하고 계획은 세워 뭐하겠나. 맘 편하게 전이나 부쳐 먹다 가면 되지. 그려. 그러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