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옷은 대체 어디서 났어요?”
경남 진주시에서 홀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이광기(37)씨가 최근 2주간 눈을 동그랗게 뜬 손님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다. 검은 면 티셔츠에 새겨진 선연한 두 글자. ‘하야(下野)’. 그가 왜 요즘 마음 편히 웃을 수 없었는지 이보다 더 잘 설명할 단어는 없을 것이다. 엄동설한에 반팔 티가 웬 말인가 싶지만 선연한 두 글자의 무게에 눈길을 주느라 바쁘다.
“좌우를 떠나 정말 이건 아니지 않나. 갑갑했죠. 지난달에는 1차 촛불집회에 참석했는데 지방에서 가게 운영하는 마당에 매번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주문했죠. 정말 뭐라도 하고 싶다는 간절한 심정으로요.”
‘고작 티 한 벌’로 생각했다면 오산. 입기 시작한 뒤 이 티는 늘 이씨 식당의 화두다. 오는 손님마다 셔츠를 화두로 입을 떼고, “이번에는 진짜 잘못했지”하며 미안해 하는 여당 지지자도 있었다. 그는 “전 국민이 우울증세를 보인다는데 오는 분 마다 힘들어 하는 게 눈에 보인다”면서 “일종의 위트처럼 옷을 화두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즐겁게 갔다”고 했다.
세계 패션계 슬로건, 투쟁의 한 해
올해 전 세계 패션계는 그 어느 때 보다 슬로건과 투쟁으로 뜨거운 2016년을 보냈다. 영국 디자이너와 작가들은 브렉시트를 반대하며 ‘In’, ‘Remain’ 등을 새긴 컬렉션을 선보였다. 미국에선 대선을 앞두고 전례 없는 캠페인 셔츠의 르네상스가 재현됐다. 유명 모델이 트럼프를 ‘아메리칸 싸이코’로 규정한 슬로건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힐러리 지지 셔츠를 디자인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이자 패션잡지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가 이 힐러리 티를 입고 마크 제이콥스 쇼에 참석했고, 관련 매체들이 일제히 “패션 여왕이 힐러리의 손을 들었다”고 대서특필하는 일대 사건도 있었다.
이 기세는 내년에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프랑스 오트 쿠튀르 브랜드 크리스찬 디오르가 2017 S/S에 올린 슬로건 티에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란 문장이 또렷하다. 패션평론가 캐시 호린은 뉴욕매거진 기고에서 지금을 “패션이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인 시기로 정의했다.
중심에는 슬로건 티의 부흥이 있다. 패션은 늘 저항과 존재 투쟁을 전제했지만, 그 흐름 속에서도 티셔츠는 조금 더 명시적인, 노골적인 수단으로 오랜 역사를 쌓았다. “아직도 제 입장을 모르시겠다면 이렇게 쉽고 친절히 말해주는 수밖에 없다”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의견을 피력하는데 슬로건 티셔츠 만한 수단이 또 없기 때문이다. 선거 캠페인에서 등장하던 슬로건 티를 컬렉션에 등장시킨 첫 디자이너는 캐서린 햄넷으로 기억된다. 1983년부터 슬로건 티를 런칭한 그가 “58% 영국인이 퍼싱 미사일 배치에 반대한다(58 Don’t want pershing)”는 슬로건을 쓴 티셔츠를 입고 마가렛 대처 당시 총리를 만난 일화는 전설로 남았다.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를 겪고 있는 국내 분위기도 심상찮다. 한국사회는 올해 페미니스트 셔츠 등으로 한 차례 슬로건 티 붐을 겪은 터다. 겨울이라 티보다는 후드가 많은 추세지만 속속 등장하는 ‘하야’ ‘퇴진’ 아이템들의 표정은 이렇다. “190만 촛불민심에도 모르쇠로 일관하시겠다면, 더 노골적으로 더 일상적으로 요구사항을 알려드리는 수밖에요.” 디자이너 컬렉션 대신 스트리트 패션, 온라인 쇼핑몰, 개인 작가, 활동가 등의 고군분투 단계이지만 이들이 선보이는 ‘투쟁소품’은 이 긴 싸움에서 지치지 말자고 서로의 처진 어깨를 다독인다.
한자로 ‘下野’라고 새긴 후드와 티, 마스크 등을 판매하는 마이클로쓰 구본민(45) 대표는 “원래 가족티, 커플티 등을 소량으로 제작하다가 하도 나라가 시끄러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기획했다”며 “역대 여러 집회, 시위가 있었지만 이렇게 수요가 있었던 건 처음”이라고 했다. 소규모 업체에 별다른 홍보도 없었지만 약 2주 만에 100여벌이 판매됐다. “밤에도 집회 현장에서 잘 보일 수 있게 마스크 글자에는 반사 원단을 썼어요. 많은 국민들이 고생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다면 만족이에요.”
미국에서 트럼프를 겨냥해 부는 ‘Not My President’ 캠페인을 연상시키는 후드도 등장했다. 국내 상황에 더 적절해 보이는 탓인지 페이스북 계정 ‘부산공감’이 공동구매 글을 올린 지 3일만에 80벌이 나갔다. 부산공감 관계자는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마음이 간절해도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 한 지인이 기획했고, 소량 주문이라 단가가 맞지 않는데도 제작 공장 측의 배려로 옷을 내놓을 수 있었다”며 “수익금 일부는 부산 문화예술인모임과 일인미디어 후원에 쓸 것”이라고 했다.
마이티(My T)는 마이티(Mighty)
아예 기부를 목적으로 티나 후드 제작한 이들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티셔츠를 만드는 어플인 ‘마이;티’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등장하는 ‘하야 티’를 110벌 제작해 원하는 시민에게 선착 순으로 무료 제공했다. 일종의 재능 기부다. 마이;티의 김태훈(43) 대표는 “각자 목소리를 내 피켓 등을 들고 거리로 나선 직장인이나, 지방에서 상경하는 학생들을 위해 버스 요금을 모금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할 수 있는 봉사가 없을까 고민한 게 시작이었다”며 “책임자들을 일벌백계 하자는 취지에서 100벌을 계획, 신청자가 많아 결국 110벌을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평화 집회를 바라보며 각자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우리 국민들도, 젊은 학생들도 모두 대단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캘리그라피 작가 박은지(25)씨는 직접 쓴 하야 촉구 문구를 SNS에 올렸다가 재치있고 재미있다는 주변 호응에 셔츠를 제작하게 됐다. “제가 입으려고 제작했는데 지인들이 서로 사고 싶다고 난리였어요. 그렇다면 좀 더 제작해 판매하고 수익금은 세월호 유가족 분들에게 기부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고 메고 4차 촛불집회 현장에 들고 간 맨투맨 티셔츠 40장은 딱 2장을 빼고 동이 났다. “좋은 일 하신다”며 즉석에서 사서 입거나, “문구가 재치 있다”고 재미있어 하는 등 반응도 뜨거웠다. “테이블도 없이 가로등 아래 돗자리 하나 펼친 게 전부였지만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셔츠를 택한 이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일상에서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쓴 이유는 다양하다. 늘 출퇴근길에 ‘하야’ 마스크를 착용한다는 윤성록(41)씨는 “마트에서 판매일을 하다 보니까 토요일에 열리는 촛불집회 참석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데 항상 마음으로는 참여했다”며 “추운 날이어도 마스크는 눈에 잘 띄니까 이렇게라도 보탬이 되려는 마음”이라고 했다. “요즘 뉴스를 보면 한편으로는 허탈하고 답답하죠. 대통령이 핑계만 대고, 거짓말로 일관하고. 제가 마스크를 쓴다고 바뀔진 모르겠지만 잘못을 인정하길 바라는 심정이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임모(26)씨는 주위 환기를 위해 ‘하야 티’를 입는다. “시험이 5개월도 안 남았는데 너무 답답해서 19일 집회에 참석했어요. 일부러 하야 티를 입고 싶어서 직접 업체를 방문해 구매했거든요. 아무리 부패가 이어져왔다고 해도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나요.” 그는 “주위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효과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뿐 아니라 각 부처와 관료들까지 국정농단에 개입됐다는 사실이 정말 더 화가 났어요.”
이들은 한결 같이 “제가 이걸 입는다 당장 뭐가 바뀔 것이란 확신은 없었다”고 입을 모았지만, 이렇게 모인 촛불의 힘이었을까. 단서는 달았지만 결국 29일 박 대통령에게서 “국회 결정에 따라 물러나겠다”는 말이 나왔다.
절망적 세태에는 과분할 정도로 선량한 이들은 ‘하야 티’를 입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선포한다. 이 땅의 주인은 프라다를 신은 그녀도, 한복 맵시를 뽐내는 그녀도 아니라고. 피의자 대통령의 퇴진을 간절히 원하는 식당 운영자. 촛불집회 참석에도 시간을 내기 어려웠던 마트 노동자. 국정농단 민낯에 절망한 공시생. 바로 우리가 주권자라고.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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