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안록
우치무라 간조 지음ㆍ양현혜 옮김
포이에마 발행ㆍ232쪽ㆍ1만2,000원
“믿~슙니까!” 첫 음절에 강세 팍팍 찍은 이 외침은 ‘개독교’의 상징과도 같은, 거부감이 울컥 밀려들게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얼굴에 좋은 기운이 흐르십니다’처럼 기분 좋은 찰나라도 선사하는 말도 아닌데, 안 그래도 큰 호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뜸 믿으라, 믿으면 된다는 말만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이창동 감독이 영화 ‘밀양’에서 신애(전도연)로 하여금 김추자의 흘러간 유행가 ‘거짓말이야’를 틀도록 했음에도, 여전히 기도하고 용서받으라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
1893년 32살의 우치무라 간조(1861~1930)가 쓴 ‘구안록’은 이 문제를 다룬 기록이다. 구안록(求安錄)은 제목 그대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들끓었던 자신이 어떻게 그 열망에서 빠져 나와 안식을 구했는가에 대한 기록이며, 그것은 결국 믿음 뿐이었음을 고백한 글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서적임에도 이 책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순전히 ‘자신과의 진솔한 대화’라는 점 때문이다. 진솔하게 대화했기에 우치무라의 삶은 다르다. 그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일본 근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탈아입구(脫亞入毆)의 주창자 후쿠자와 유키치와 정반대 입장에 서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일제에 맞서서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하면서 국적(國賊)이라 불렸던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을 쓰기 2년 전인 1891년에는 천황이 직접 서명한 ‘교육칙어’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극우의 테러 표적이 되어 직장을 잃고 한동안 가명을 쓰고 숨어 살아야 했다. 애국 세력임을 자칭하는 이들이 벌이는 짓이란 늘 이렇다.
지금은 우치무라의 이런 면모 덕분에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음에도 엄청난 신도 수를 자랑하는 한국과 달리 사회적으로 존중 받을 수 있게 됐다는 평을 받는다. 동시에 그런 우치무라이기에 민족 감정을 뛰어넘어 김교신ㆍ함석헌ㆍ송두용 등 한국의 대표적 기독교도들이 스승으로 우러러 모신 사람이기도 했다. ‘구안록’을 번역하고 해제를 달아둔 이도 김교신 연구자인 양현혜 이화여대 교수다.
흔히 믿음을 지니고 평안함을 얻어서 천국을 간다고 한다면, 다들 ‘선행’을 떠올린다.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복도 받고 그런 것 아니겠냐는, 인과응보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다. 인간은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선행 좀 어쩐다 해서 나아질 건 없다. 아니 오히려 ‘나 좀 착하지 않아요?’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때문에 좋지 않다. 선행이 커질수록 더 위험해진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분량을 넘어서는 자선을 한다면 그 자선은 위선이 되고 만다.”
망해가는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이었던 우치무라는 편히 살 수 있는 고급 공무원의 길을 포기하고 미국 지적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의 간호부로 일하다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는 자신의 도덕적 훈련을 위한 결단이라 했지만, 그 결정 또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행위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치무라의 표현은 이렇다. “성서라는 전등으로 내 마음을 샅샅이 비춰보면 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요, 사람을 속이는 자다. 나는 그처럼 밝은 빛을 견딜 수가 없다.”
괴로워하다 그게 속죄론의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줄리어스 실리 애머스트대 총장의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자네는 어린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놓고 그 성장을 보려고 매일 그 놈을 뿌리째 뽑아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네. 왜 햇빛에 맡기고 안심하고 자네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죄에 막혀 무력해지거나 이미 지은 죄를 핑계 삼아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그 죄를 십자가를 통해 예수에게 대신 물었고 용서받았기에 그 다음 할 일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아름답게 생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우치무라는 “나의 전 존재가 응답하고 내 경험이 이를 증명하기”에 “이렇게 미신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진리 중의 진리”라고 확언한다.
그렇기에 선행은 천국으로 가기 위한 조건부 행동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든 자가 기쁨에 겨워 행하는 모든 행위의 결과물일 뿐이다.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사랑에 고무돼 선을 행한다.” 그렇기에 선행이란 게 남달리 대단한 게 아니다. “자선사업하는 사람을 면전에서 칭찬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가 큰 인물이라면 칭찬을 불편하게 여길 것이요, 소인이라면 칭찬 때문에 타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우치무라가 말하는 이유다.
믿으면, 속죄하면 용서받는다는 식의 흔한 논리에 균열을 낸다.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이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는 일갈이다. 관건은 죄를 아느냐다. “세상에 자기 죄를 깨달은 기독교 신자처럼 곤궁한 자는 없을 것”이지만 “죄에 대해 무감한 기독교 신자처럼 강한 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모르는 이는 가장 “대담무쌍하여 무엇이든 다 하는” 사람이다. 뭐든 다 용서받을 수 있으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치무라는 “정의와 거룩을 방패로 삼아 죄를 범하려는 자도 다 교회로 오라!”고 역설적으로 외쳤다. 이리 보면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이미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 교세 확장이라는 이름 아래 교회가 앞장서서 그 오해를 심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믿~슙니까!”란 외침은,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며 요란스럽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의 성찬은, 그에 맞춘 열광의 도가니는 정작 믿음과 별 상관이 없다. 어쩌면 그토록 요란하게 떠드는 건,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일 수 있다. 염치와 성찰을 찾고 싶다면, 종교와 무관하게 한번 읽어 볼만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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