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서적 ‘수신기’ 근거로
사전에도 실어 기정 사실화
실제 문헌엔 ‘고구려’ 표현 없고
요리법 관련 구체적 기록 전무
‘오랜 음식=훌륭’ 얕은 담론 넘어
사료 하나하나 냉정한 분석을
맹신이 낳은 거짓말만큼이나 구제불능인 거짓말이 또 하나 있다. 없는 기록을 있다고 하고, 마침내 세부까지 보태 창조한 ‘음식 문화사’가 그것이다. 이윽고 학자와 시민과 대중문화가 역사로 둔갑한 낭설을 서로 복사하고 붙인다.
어느 책에 나온다는데 암만 다시 봐도 그런 기록이 없다. 해당 문헌을 뒤져 해당 면을 펴 “그런 기록 없습니다” 하고 일러준다. 헛수고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도끼눈을 뜬 상대가 볼멘소리로 쏘아붙인다. “우리 교수님, 내 선생님이 있다고 했소! 당신이 박사님보다 더 잘 안단 말이오?” 더한 반론도 있다. “드라마 ‘대장금’에 나와요!”
이쯤이면 온몸에 맥이 탁 풀린다. 음식을 놓고 정말 필요한 생각과 대화를 나눌 틈은 늘 부족하기만 한데 사이비역사를 허들 삼아 별 보람 없는 장애물 달리기부터 해야 한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한마디가 반짝한다.
“기록이라는 것은 원래 그 당시 너무 당연한 일은 적지 않는다. (중략)어느 시대의 당연한 일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없고, 무리하게 알려고 하면 거기에서 터무니없는 오해가 생기게 된다.” 아울러 나를 장애물 달리기에 내모는 빈도가 무척 높은 음식, ‘맥적(貊炙)’이 반짝한다.
‘맥적=불고기’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이들
이런 식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은 맥적을 고구려의 불고기로 설명한다. 이때 맥적 이야기 속 ‘맥(貊)’이 곧 고구려라고 한다. 그러고는 중국 진나라 때의 ‘수신기(搜神記)’에는 맥적을 만들 때 “장과 마늘로 조리하여 불에 직접 굽는다”라고 했단다. 마무리도 완벽하다. 이 맥적이 고구려로 계승되어 오늘날 불고기의 원조가 되었단다. 아득한 고대에서 오늘날 한국에 이르는 양념 고기구이의 역사가 그럴 듯하게 설명된다. 맥적 덕분에 불고기의 역사까지 완결되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오늘날 한국인이 지닌 거의 모든 교양과 상식의 출처라고 할 만한 네이버.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맥적은 고구려 시대부터 시작된 역사 깊은 음식으로, 된장에 재워 두었다가 구워 내는 요리로 불고기의 원조라고 한다. 그 근거는 앞서 본 ‘수신기’다. 역시 네이버가 제공하는 두산백과의 불고기 항목도 불고기를 고구려의 맥적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설명한 뒤 “맥적은 양념한 고기를 꼬치에 꿰어 불에 구워 먹는 음식”으로 정의한다.
나라가 인력과 시간을 들여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불고기 항목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고기구이는 맥적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맥은 중국의 동북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고구려를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 뿐 아니다. 한식재단의 웹페이지 또한 불고기 항목에다 “우리나라의 전통 고기구이는 맥적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을 붙여뒀다. 이 재단은 스스로 한식의 진흥, 정통성 정립, 세계화 등을 설립 목적으로 내걸고 있다.
알 만하다. 이 항목 집필자들은 ‘수신기’를 읽어 본 적이 없거나, 아니면 ‘수신기’를 읽고서도 향신채에 장에 불고기까지 불러냈다면 의도를 갖고 적극적으로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직접 수신기 읽어보니 고구려 없다
에두를 것 없겠다. 바로 ‘수신기’를 펼친다. ‘수신기’는 4세기쯤 동진(東晋) 사람 간보(干寶)가 편찬한 책이다. 전설과 민담과 참언이 뒤섞인 기이한 이야기 모음이다. 현실을 반영한 몇몇 내용은 더러 중국 왕조가 편찬한 정사에 오르기도 했다. 맥적과 관련한 대목은 이렇다.
“호상과 맥반은 적인의 기물이다. 강자와 맥적은 적인들의 음식이다. 태시(265~274년) 이래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게 됐다. 귀족과 부자들은 반드시 그런 기물을 쌓아두고, 잔칫날 귀한 손님들에게 앞다투어 내놓았다. 이는 융적이 중국을 침입할 징조였다”(胡床貊盤, 翟之器也. 羌煮貊炙, 翟之食也. 自太始以來, 中國尙之. 貴人富室, 必留其器, 吉享嘉賓, 皆以爲先. 戎翟侵中國之前兆也)
없다. 고구려가 없다. 그 어떤 향신채도, 마늘도, 장도, 꼬치구이도, 양념에 고기 재우기도 없다. 맥적이란 음식 이름마저 맥(貊)이란 종족이 아니라 적(翟)이란 종족의 음식으로 기록했다. ‘수신기’는 3세기 이래, 중국 입장에서 대강 북방 오랑캐라고 일컬을 만한 종족의 풍습과 음식이 중국에서 유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해뒀을 뿐이다. 오랑캐 문화의 유행이 곧 중국의 쇠락과 오랑캐 침입의 징조라는, 고대 사회에 흔한 참언 또는 예언이다. 이 기록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런 가운데 맥적이라는 음식 이름 또는 요리 방법이 남았을 뿐이다. 그 뒤로 보이는 중국 정사 또는 기타 문헌 속의 맥적 이야기는 모두 ‘수신기’를 출처로 한다.
백 번 양보해 맥과 적과 융적이 모두 고구려를 가리킨다 해도 오늘날의 불고기에 가까운 양념 고기구이를 가져다 댈 여지가 없다. 고구려의 향신채, 장, 장을 담기 위한 콩과 소금, 그리고 음식 및 요리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유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해서 고구려가 망하기까지 중국 정사 등이 고구려인의 식생활을 담기는 했다. 다만 그 기록이 너무나도 단편적이어서 재료, 요리 방법, 음식의 세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림으로는 4세기에 조성된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가 당시 주방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불을 피운 아궁이와 솥, 그리고 여러 종류의 네발짐승이 갈고리에 매달려 걸린 모습이 그림 속에 분명하다. 그냥 거기까지다. 양념 고기구이를, 더구나 불고기를 끌어대기에는 문자도 그림도 유물도 부족하고 막연하다.
합리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보다 앞선 맥적 기록이 없는지부터 궁금할 것이다. ‘수신기’에 앞서 적어도 3세기 초반에 한나라에서 편찬된 사전 ‘석명(釋名)’에 맥적이 등장한다. 이 기록은 “맥적은 통으로 구워, 각자의 칼로 저며 먹는다. 오랑캐(호맥)의 방식에서 나왔다(貊炙, 全體炙之, 各自以刀割出於胡貊之爲也)”라는 간명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서 맥적의 윤곽이 드러난다. 몽골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어느 유목 민족에게나, 그리고 그 후예들에게 남아 있는, 한데다가 불 피워 하는 네발짐승 통구이 요리 말이다. 이는 인간이 초식동물에서 잡식동물로 변할 무렵 아득히 먼 인간의 조상들이 시도했음직한 방법이다.
맥적은 유목민족의 로우테크 요리
과장을 보태 말하면 네안데르탈도 호모 사피엔스도 시도했음 직한 요리법이다. 있는 기록을 평평한 마음으로 독해하고 보면, 맥적에 고대 특정 민족이나 오늘날의 특정 국가를 끼워 넣을 틈은 보이지 않는다. 있다면 지구상 어느 민족이라도 해 먹었을 만한 기본기술(Low-tech) 음식이 있을 뿐이다. ‘수신기’나 ‘석명’이 보여주는 음식은 불고기가 아니다. 어느 종족 또는 민족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기본기술 고기구이다.
이쯤에서 다시금 발끈해 최남선의 ‘고사통(故事通)’을 들먹일 분도 있겠다. 역시 ‘고사통’을 읽은 적 없는 분들이다. 최남선은 “맥적 곧 부여식 고기구이”라고 썼다. 그뿐이다. 앞도 뒤도 논증도 근거도 없이 그렇게 써 놓기만 했다. 고구려도 없다. ‘고사통’을 가지고 맥적과 불고기의 역사를 운운한다는 것 또한 역사를 창조할 위험이 크다.
그저 혀를 차고 말 일이 아니다. 이렇게 창조된 맥적과 불고기의 역사 또한 깊이 읽고 음미할 필요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 오래됐다고만 하면 음식에 위엄이 있고, 그것만으로 이미 훌륭하다고 여기는 섣부르고 얕은 생각부터 냉정하게 응시할 필요가 있다. 이야말로 반성하고 고쳐 마땅한 한국인의 고질이다.
음식에 대한 학자의 연구와 시민의 교양이 두루 부족함도 직시해야 한다. 음식 문화사 연구는 자료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답습에 빠져 있다. 시민은 검색창 찍어 나오는 내용을 복사해 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지난 음식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도, 오늘의 음식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인식도 불가능하다.
맥적을 둘러싼 거짓말이 환기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 사회이다. 저마다 음식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누구나 수천 년을 거슬러 오르지만, 실제로는 지난 역사에도 오늘에도 성의가 없는 한국인의 허름한 음식 담론이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증거가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해야 한다. 부족하므로 더 신중해야 한다. 그러고서야 제대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거짓과 허튼 공상으로 가져다 붙인 설명은 공부의 여지를 끊어버린다. 그 다음 공부의 싹을 밟아버린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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