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2일)도 공연 연습을 했고, 내일 모레에도 잡혀 있어요.” 23일 오후 서울 서초동 YPC프로덕션. 기타와 드럼 등 악기가 빼곡한 2층 연습실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가수 조용필(68)은 아직도 ‘연습생’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엔 런스루(시작부터 끝까지 실제 공연처럼 연습)까지 한다. 1분 30초 멘트 시간까지 따지며 실전처럼 연습한다. 최근엔 체중이 5㎏이나 빠졌다. 내달 12일 서울에서 시작해 대구, 광주 등에서 이어갈 데뷔 50주년 공연 ‘땡스 투 유’ 준비 탓이다. 조용필은 중ㆍ저음의 곡을 집중적으로 부른다. 나이가 들어 힘이 떨어지면서 중ㆍ저음이 약해졌다고 판단해서다.
아내 잃은 슬픔… 잊지 못할 2003년
역경 없이는 ‘가왕’도 없었다. 조용필은 “2003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돌아봤다. 그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 슬픔에 가득 차 있을 때였다. 조용필은 “처음으로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공연했는데 그때 음악이란 기둥이 있어 버텼다”며 “(인간 조용필과 가수로서의) 슬픔과 기쁨이 함께 하던 시기”라며 의미를 뒀다.
‘창밖의 여자’(1980)부터 ‘헬로’(2013)까지. 세월을 거슬러 숱한 히트곡을 낸 조용필의 무대는 일본과 중국까지 넓어졌다. 조용필은 화려한 무대 대신 한센병 환자들이 살던 소록도에서의 공연(2010)을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 중 하나로 꼽았다. 조용필은 “내 손 잡고 너무 좋아해주셔서 한 번 더 오겠다고 하고 이듬해 갔더니 전보다 (낯익은) 환자분들이 줄어 안타까웠다”고 옛 얘기를 꺼냈다.
‘택시운전사’에 ‘단발머리’ 사용 허락한 이유
조용필의 히트곡 ‘단발머리’는 지난해 1,2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택시운전사’에 삽입돼 새삼 주목받았다. ‘단발머리’가 한국 영화에 삽입되기는 처음. 조용필은 “내가 경험한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시절을 다룬 영화라 흔쾌히 쓰라고 했다”고 뒷얘기를 들려줬다.
조용필은 시대와 호흡한 가수였다. 1975년 재일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동포 700여 명이 부산으로 처음 입항할 때 흘렀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국민을 울렸고, ‘허공’의 탄식은 학수고대하던 민주화가 12ㆍ12 사태로 물거품이 돼 실의에 빠진 이들을 보듬었다. 조용필은 “내 노래를 운동권에서 많이 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랜 시절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노래를 불러 겪게 된 우스꽝스러운 일화도 털어놨다.
“처음에 ‘창밖의 여자’ 내고 ‘단발머리’ ‘비련’ 나오니 팬분들이 “꺅”하고 소리쳐줬잖아요. 부모님들이 듣기 싫어 저 나오면 TV 끄라고 그랬다더라고요. 그런데 ‘한오백년’ ‘허공’ 부르니 ‘TV켜라’로 변했다고요. 어른들도 같이 좋아하게 된 거죠, 하하하.”
“ 새 앨범? ‘헬로’ 보단 나아야 하는데…”
조용필은 장르 탐험가였다. 국악(‘한오백년’)을 비롯해 블루스(‘대전 블루스’), 뮤지컬 (‘도시의 오페라’), 동요(‘난 아니야’)까지 아울렀다. 예순 셋이던 5년 전 랩(‘바운스’)까지 했던 노장은 요즘 스웨덴 출신 유명 DJ 아비치(1989~2018)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새 앨범 작업은 큰 숙제다. 5~6개의 신곡을 만들어 놓은 조용필은 “20집은 19집보단 나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라고 말했다.
조용필은 이달 북한 평양에서 열린 공연 ‘봄이 온다’에 참여해 남북 문화교류의 씨앗을 뿌렸다. 우리 예술단 환송 만찬에서 조용필은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과 그의 노래 ‘그 겨울의 찻집’을 불렀다.
조용필은 “현 단장이 ‘다 마셔야 한다’고 술을 권해 두 잔을 마셨다”며 “굉장히 호탕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조용필은 2005년에도 북한에서 공연해 현지 관객과 만난 적 있다. 두 번이나 남북의 문화 교류에 앞장선 만큼 27일 열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크다. 조용필은 “우선은 평화”라며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많은 문화교류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봄이 온다’처럼 가을에도 좋은 결실을 보았으면 한다”고 바랐다.
“음악이 곧 삶인” 조용필에게 음악 여정은 아직도 ‘봄’이다. 조용필은 “아흔 살이 넘은 분도 꿈이 있지 않나”라고 반문하며 “꿈은 바로 내일이고, 내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의 지론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계속 두드리는 것”이다. 조용필은 “지금도 음악을 배워가고 있다”며 희망을 얘기했다.
“1999년인가 미국에서 밴드 비치 보이스 공연을 보러 갔어요. 서너 세대가 같이 오더라고요. ‘아, 이게 음악의 역사구나’ 싶었죠. 저도 여섯 살 아이가 제 노래를 듣고 예순이 넘어서도 절 기억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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