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윤창식
기자

등록 : 2018.01.13 13:18

‘먼길 한길 30년’ 서덕순 서덕순한복연구실 대표

등록 : 2018.01.13 13:18

서덕순 서덕순한복연구실 대표

“한복은 우리 몸 맞이하는 최고의 환대”

덥석 잡은 손이 읽혔다. 살아온 자취가 손바닥 지문처럼 돋았다. ‘코드’를 읽는 데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의 손은 카드, 내 손은 와닿은 부호와 내역을 순식간에 읽어 들이는 단말기였다. 그 사이로 물결무늬 같은 와이파이가 터진 것일까. 특별한 일은 아니다. 둔한 사람이라도 가끔씩 정직한 손을 잡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대구 대봉동 서덕순한복연구실. 서덕순(58) 대표(원장)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더 손을 감춘다. 말하자면 그의 손은 감추고 싶은 비밀. 쉰 후반 나이답잖게 앳되다 싶은 첫인상은 악수하는 순간, 표나지 않을 만큼 당황한다. 크고 두텁고 단단한 손. 잠깐 남의 손을 잡았나 싶다가 이내 미안해졌다. 강렬한 손의 첫인상은 오래 남았다. 그가 가장 싫어한다는 손 이야기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 두텁고 단단한 손이 말해주는 것

그의 손은 지역에서 몇 안 되는 ‘문화재급’이다. 손님 몸을 재는 일부터 한복 짓는 모든 품을 혼자 해냈던 ‘한복 장인 1세대’. 그들이 거의 다 은퇴했기 때문이다. 고령이어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몸이 고달파서, 그리고 돌아가셔서 그들이 떠나자 명맥이 끊겼다. 장인이 떠난 자리는 외부 주문 제작(외주) 방식이 차지했다. 주문 받는 사람과 바느질하는 사람이 다르다. 딴 사람이 딴 장소에서 따로 일한다. 요즘 대부분 한복(전문)점들이 그렇다. 서 대표처럼 한복 짓는 모든 공정을 직접 아우르는 ‘문화재급 장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외주는 손쉬워요. 최초 주문 따로, 생산 따로. 자체 생산 시스템 없이도 대량 생산이 가능하죠. 외주는 몸 재는 사람과 옷 만드는 사람이 다릅니다. 둘 사이에 공유되는 부분은 치수 몇 개예요. 체형은 얼굴 생김이 그렇듯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몸의 치수 몇 개로 체형을 파악할 수 있을까요?”

‘외주 대세’ 현실에서 전통 지키려

한복에는 가봉이 없다. 한 번에 만들어 딱 맞춰야 한다. 그가 지은 한복은 치수가 같아도 모양은 다 다르다. 치수만이 아니라 체형에 따라 짓는 ‘한복의 정통’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정통은 전통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한복 짓는 전 과정을 구석구석 꿰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외주는 치수에 따라 옷을 만들어요. 체형까지 고려할 수가 없습니다. 치수별로 표준화한 패턴에 따라 옷을 만드니까요. 한복은 치수가 아니라 체형에 맞춰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몸에 딱 맞고, 태가 납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한복을 패턴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지금처럼 한복을 외주로 만드는 방식으로 가면 머잖아 한복의 전통은 사라질 거예요. 외주라는 틈을 타고 국적 불명의 중국산 주·부재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오랜 경험과 노하우는 ‘정통’이 되는 필요조건이지만 다는 아니다. “한복 일에는 특히 뛰어난 눈썰미가 필요해요. 손님의 사소한 버릇 하나, 순간적인 분위기를 잡아내야 체형과 마음에까지 맞는 옷을 지을 수 있습니다.” 쉴 새 없이 몸을 부려야 하는 바지런함과 명절·혼수철엔 몇날며칠을 몰아쳐야 하는 일의 특성상 끈기와 집중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의상학과 조형학, 색채학의 이론적인 지식과 이를 실제 적용할 전문가적 안목을 갖춰야 한다. 그런 것을 다 감당하느라 그의 세월은 두껍고 단단해졌다.

“한복은 한 땀 차이의 예술”

“한복은 한 땀 차이의 예술이라고 하죠. 1mm의 오차가 옷을 그르치기도 하니까요. 섬세한 손길이 구석구석 필요해요. 그래서 시간 품이 많이 듭니다. 바쁜 도시인·현대인들과는 결이 많이 달라요.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옷이에요. 한복에는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입었을 때 편안함과 위로를 느낀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죠. 한복을 입는 것은 한복의 분위기, 한복의 문화를 입는 엄청난 일입니다. (웃음)”

그는 집을 짓듯 옷을 짓는다. 그는 옷 짓는 일을 ‘마인드 컨트롤’이라고 한다. 처음 손님의 모습을 사진 찍듯 머릿속에 담아뒀다가 옷 일을 시작하면 모두 불러낸다. 그의 마인드 컨트롤은 이 사진을 모아 입체영상으로 만드는 것. “저는 이렇게 만든 손님의 입체영상에다 여러 번 옷을 입혀보지 않고서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옷을 짓는 동안 마음의 평정을 흩뜨리지 않으려 애쓰죠. 자극적인 말이나 장면은 애써 피합니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마인드 컨트롤이 잘 되지 않거든요.” 그런 날은 일을 잠시 미룬다. 그의 집과 가게에는 TV가 없다.

그의 한복 가게 주문서는 다른 한복집보다 칸이 많다. 가슴 둘레, 소매 길이(화장), 치마 길이 말고도 얼굴형, 목 길이와 굵기, 목과 진동의 비례, 어깨형(넓다, 좁다, 처졌다), 뒷목살의 정도, 젖가슴 크기, 걸을 때 몸의 자세(몸을 숙이느냐, 세우느냐), 첫인상이나 주관적 느낌(우아한가, 귀여운가, 소박한가, 멋을 내는가, 외향적 또는 내향적) 등…. 그는 이 목록도 모자라 칸 사이사이 뭘 자꾸 더 적는다. 그의 마인드 컨트롤 재료들이다.

그의 손은 작은 한복박물관 한 채

“한복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에요. 멋쟁이였던 할머니와 고모를 따라다니며 옷도 많이 사고 그랬는데, 시장에서 맞춘 한복은 맞지를 않는 거예요. 대충은 맞는데 막상 입으면 안 맞는…. 속상해서 못 입겠더라고요. 어머니한테 고쳐 달라고 하려다가 바쁜 어머니 대신 제가 직접 고쳐봤죠. 집에 재봉틀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작했는데 재미가 붙어서 나중에는 식구들 한복까지 고쳐드렸어요. 칭찬을 많이 들었죠. 그러다 본격적인 한복 복식과 바느질 공부를 시작한 게 1988년 무렵이에요. 취미 아닌 직업을 시작한 거죠. 그 후 살림집에서 주변 사람들의 한복을 지었죠. 서울 한복디자이너에게 납품도 시작했고요. 5년쯤 지나자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1994년 대백플라자 뒤 웨딩골목. ‘한복 1번지’에 그는 지금의 서덕순한복연구실을 열었다. 그러고 25년.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한결같다. 한복을 짓는 모든 공정을 혼자 추스른다. 귀태와는 먼 그의 투박한 손은 그 세월을 감당해온 물증이자 내력이다. 그의 손은 작은 한복박물관 한 채. 그의 손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 이유다.

서 대표의 손은 두텁고 단단하다.

■ 어릴 적 – 지금을 있게 한 세 가지

억척스런 손과는 딴판으로 그는 원래 ‘자타 공인 공주과’였다. 그의 고향 영천 자천리는 동쪽으로 보현산, 서쪽으로 화산을 지척에 둔 화북면 소재지. 3정승 대제학의 후예라는 긍지 높은 대구 서씨 봉사공파 세거지다. 이 마을에서 그의 아버지는 8남매의 맏이로 문중 일을 맡아 보았다. 서 대표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해버렸다. 총기 있고 밝은 성격에 붙임성이 있어 할머니와 자주 말벗이 됐다. 사촌들은 그에게 ‘할머니밖에 모른다’고 타박했고, 고모와 삼촌들은 할머니에게 ‘덕순이밖에 모른다’고 투정했다.

당시 영천 사람들에게 대 서씨 문중은 권력과 재력, 학덕을 문패처럼 두른 집안이었다. 영천여중·고를 설립했고, 대구 서연학당을 설립할 집과 장서를 제공했다. 영천주차장을 비롯한 요지마다 상당한 규모의 땅도 소유했다. 한편 권력의 핵심이라 할 자리를 두루 지내기도 했다. 모두 그의 증조할아버지와 집안 아재들이었다.

대구 서씨 문중의 힘

자천리 대구 서씨 문중은 주민 숙원 사업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마을 복판 강을 건너는 다리를 놓은 것.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고현천은 큰비만 오면 넘쳤다. 나무다리는 자주 떠내려갔고 강을 건너려면 500m 정도를 돌아가야 했다. 그때마다 마을 주민들은 울력을 붙여 나무기둥으로 엮은 다리를 새로 놓았다. 서씨 문중은 이 자리에 번듯한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마을사람과 부근 주민들의 칭송은 당연한 것. 사람들은 이 다리를 ‘대구 서씨 다리’라고 불렀다.

다리 개통식 날. 아직 테이프커팅도 하지 않은 다리를 마음대로 다녀도 괜찮은 예외가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어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익숙했다. 서 대표였다. 그는 그때가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라고 기억한다. 오색 테이프로 ‘봉인’된, 아무도 안 다니는 다리를 그는 ‘공식 행인 제1호’보다 먼저 건넜다. 기분이 좋았다. 행사 장식용 아치에 달린 풍선을 몇 개 뽑아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다음날 등교하자 그의 인기는 글자 그대로 ‘공주급’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곳간에서 인심 난다.’ 곳간을 여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환원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이다. 권력으로 이름을 드러낸 형제와 학덕으로 이름을 드러낸 형제 사이에서 그의 할아버지는 후자 쪽을 택했다. 조용히 고향에서 살면서 문중 일을 돌보며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특히 선비와 유생들을 정성스레 맞이했다. 할아버지는 과수원과 논밭을 직접 경영했다. 어린 그의 눈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과수원과 논밭이 넓었다. 서 대표의 마음속에는 인자했던 할아버지만큼 넓은 과수원과 논밭이 아직도 있다.

순수함과 ‘공주과’

고현천은 자천에서 남쪽으로 18km쯤 흘러 영천 시가지 서쪽서 신녕천에 합친다. 깊어진 신녕천은 이내 동쪽에서 흘러드는 자호천과 다시 합친다. 고현천, 자호천이 차례로 몸을 섞어 신녕천이 거세질 무렵, 금호강이다. 그 잠깐의 만남과 합침. 세 줄기 물이 만나 새 강이 발원하는 물의 길목, 무슨 상관이랴. 상류 50리 자천마을 아이들은 마냥 고현천에서 논다. 미역감고 헤엄치고 다이빙하고 잠수타고 물장구치고, 썰매 타고 팽이 치고 연도 날리고….

꺄르르. 여름 노루새끼마냥 천둥벌거숭이들은 여기저기 옷을 벗어 내던져놓고 물에 뛰어든다. 그럴 때 그 친구들의 옷을 다 거둬 오는 아이가 그였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곡차곡, 아이별로 따로 개어 가게를 차리듯 가지런히 놓아두면 옷들이 예뻤다. 버린 허물을 다시 입고 싶은 옷으로 만든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는 이제 뙤약볕에 쪼그려 앉아 옷을 지켰다. 누가 지켜달라고 붙잡는 것처럼. 사실은 친구들이 물에서 나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공주’는 끝까지 기다린다. 긴 시간이었지만 그는 심심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의 몫까지 놀아주었다.

“할아버지는 혼례나 묘사, 기제 등 집안의 대소사에 어린 저를 즐겨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소달구지를 탔어요. 학교 오가는 길 말고는 멀고 가까운 거리를 저는 대부분 소달구지를 타고 다녔죠. 소달구지 타고 가는 저에게 어머니는 얼굴 탄다고 양산을 씌워주었어요.” 1960년대 소달구지는 요즘의 승용차에 버금가는 것. 양산 역시 흔치 않던 시절, 소달구지와 양산의 조합은 요즘으로 치면 전형적인 ‘공주과’의 조건이겠지만, 친구들은 골목에서 뛰어나와 그런 친구를 반가워했다.

동심이라는 ‘전설’이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그의 얘기가 그려내는 그림들은 꼭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같다.

온통 할머니, 늘 그리운

“그때 제가 친구들이랑 물놀이를 하지 않는 것은 할머니 말을 잘 들어서예요. 할머니의 말은 어길 수가 없었어요.” 강변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할머니들처럼 그의 할머니도 강에 나가 물놀이하는 것에 특별한 조심과 얼마간의 공포를 매달아 놓았다. 하지만 역시 강변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할머니의 말을 꼭 듣는 아이는 근동에는 없었다. 그는 달랐다. 그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은 할머니뿐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가리키는 쪽으로 어느새 그의 마음이 먼저 가 있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한 번도 저를 꾸짖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저는 할머니 말의 토씨까지 다 지키려 했거든요. 할머니는 저의 마음에 저보다 먼저 들어와 들여다본 것 같아요. 지금껏 살면서 참 많은 ‘해설’을 들었지만, 할머니만큼 딱딱 들어맞는 해설을 들어보지 못했어요.”

할머니는 나이 들어서도 마실에 놀러 나가지 않았다. 시간 날 때마다 조용히 좌정하고 책을 읽었다. 고전소설에서 역사소설, 불교경전을 즐겼다. 그러다 학교를 파한 그가 집에 돌아오면 “오늘은 학교에서 우예(어떻게) 지냈노?”하고 물어봤다. 손녀와 대화를 시작하는 신호였다. 손녀는 신이 나서 그날 학교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다 일러바쳤다. 그러면 할머니는 그 중에 잘한 거 한 가지 이상을 칭찬했다. 할머니는 그가 하려는 일을 항상 응원했다. 그가 한복 일을 시작하려 할 때 끝까지 그를 지지해준 사람도 할머니였고, 맨 먼저 한복 가게를 방문한 가족도 할머니였다.

한겨울 함박눈이 쏟아지면 할머니는 그를 데리고 쌀, 보리, 조, 콩 등의 곡식 주머니를 광주리에 담아가서 뒷산 입구에 뿌렸다. 눈에 갇힌 산짐승, 날짐승들을 먹이려는 것이다. 또 많이 추운 날은 강가에 나가 얼음에 구멍을 내고 숟가락으로 곡식을 퍼다 넣었다.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떠먹인 것이다. 할머니는 어린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훌륭한 생태주의자였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생각할수록 할머니는 참 많은 것을 헤아리는 지혜롭고 자애로운 분이었어요. 지금 저는 흉내도 못 낼 만큼요. 할머니 생각, 할머니 얘기를 많이 합니다. 늘 그리워서요.”

영천여고 2학년 때 고전무용반 발표대회를 마치고 교정에서 할머니와 함께. 할머니는 서 대표를 응원하기 위해 자주 공연을 보러 오셨다.

■ 손님과 환대

“이른 아침 대문 활짝 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온 집안에 비질이 시작됐어요. 부식이 아재(그의 집 머슴이다)가 큰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대문간과 골목 앞까지 쓸면, 할머니는 자그만 수수 빗자루로 봉당과 댓돌, 툇마루 아래, 측간(화장실)을 쓸었죠.” 할머니가 해 뜰 무렵부터 비질을 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골목부터 마당까지 집안이 정갈해야 복이 들어온다는 것. “(여자는) 속옷이 정갈해야 복을 받는다”는 말과 함께 할머니는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복권 같은 제비뽑기도 아니라는 것. 골목서부터 대문, 마당, 봉당, 툇마루, 측간까지 정갈히 비질하는 몸놀림과 마음가짐이 복밭이었다.

날마다 비질…복맞이는 손님맞이

할머니는 ‘복이 들어오는 길’을 날마다 비질했다. 골목-대문-마당-봉당-툇마루, 그리고 측간. “할머니는 이 길로 복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고 자주 말했어요. 어릴 때 정말 그 말을 믿었습니다.” 할머니의 말에 비유의 함축이 있다. 복이 무슨 다리가 있어 걸어 들어온다는 걸까. 이 길은 그대로 손님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동선이다. 복이란 손님에 대한 비유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할머니가 매일 아침 비질하며 맞이한 것은 손님이었다. 손님이 복덩이였다. 집안이 정갈해야 복이 들어온다는 할머니의 말도 손님을 정갈히 정성껏 맞이하라는 당부가 아니었을까.

그가 어릴 때는 거지가 많던 시절이었다. 그의 집 부엌 옆 마당 한쪽에는 그의 키보다 큰 찬장과 작은 마루가 나와 있었다. 거지 전용 식당인 셈이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거지 전용 식당’을 둔 집은 그의 집 말고 없었다. 집안에서 이 찬장의 유일한 담당자는 할머니였다. 거지가 집안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찬장에서 거지 숫자만큼 그릇을 꺼내 그날 음식을 차려서는 마루에 내놨다. “할머니는 ‘너는 성이 무어고?’라고 묻거나 ‘천처이 무라’고 말하면서 ‘손님들’이 무안하지 않게 응대했다. 다른 일을 해가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찾아온 손님에 대한 주인의 예의였다.

‘손님들’이 가고 나면 할머니는 그릇을 우물가로 가져가 짚수세미로 한참을 문질러 닦았다. 놋그릇을 닦아 반짝반짝 빛을 내듯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는 한 가지를 더 거쳐야 끝났다. 그릇을 햇볕에다 늘어놓는 것. 일광소독이었다. 바짝 마른 그릇은 다시 찬장에 넣어 보관했다. 이것 역시 할머니 담당이었다.

종일 한복 손질하던 어머니 모습 그대로

‘양반집 접빈객에 하루가 지샌다’다지만, 그의 집안 손님맞이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할머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손님맞이를 위해 종일 일만 하는 사람이었어요. 일은 크게 두 가지였죠. 손님에게 내놓을 음식을 장만하는 일과 손님맞이 때 입을 남정네들의 한복을 손질하는 일. 이 두 가지와 여러 집안일로 어머니는 매일같이 늦게까지 일했어요.”

그가 거의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부모 자식이 멀리 떨어져 살아서가 아니었다. 집안의 촌수가 너른 데다 손님들의 걸음이 워낙 이어져서 맏며느리가 손님맞이에 아예 붙박여야 했던 것. 그러다 보니 자식(손주) 돌보는 일은 시어머니 몫이 됐다.

문중 손님맞이를 위해 자식을 떼어놓았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그만큼 손님맞이에 정성을 다했다는 말이다. 보통 문중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복을 맞아들이듯이 손님을 맞아들인다는 것. 아름답고 음전한 마음이 빚어내는 풍경, 환대의 풍경이다.

종일 일만 하던 친정어머니의 모습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됐다. “밤늦게까지 한복을 손질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어느 날 깜짝 놀랐어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 제 모습과 너무 똑같은 거예요. 일부러 어머니처럼 살려고 한 적은 없는데, 제가 지금 어머니와 똑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 울컥했죠.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한복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그렇게 반대했구나. 딸 고생한다고.’” 밤늦도록 한복을 손질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는 날마다 보면서 자랐다. 그런 어머니의 상이 무의식에 담겨 운명 같은 힘이 된 걸까. 심지어 일에 바빠 첫아이를 돌보지 못해 시어머니 신세를 졌던 어머니처럼 그도 한복 일에 쫓겨 17개월 된 첫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겨야 했던 것까지 똑같다.

손님들 흰 고무신 씻어놓는 ‘환대의 세례’

“검정 고무신에 이어 나온 흰 고무신이 대접받던 때였죠. 손님 발걸음이 이어지던 사랑방 앞 봉당 댓돌 위에는 그날 손님들이 신고 온 흰 고무신들이 깨끗이 씻겨서 놓여 있었어요. 씻어서 물이 빠지라고 댓돌 위에 가지런히 엎어 놓았어요. 지금도 그 모양이 선하네요.”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시킨’ 거라기보다 ‘가르쳐준’ 지혜였다. 손님의 신발을 깨끗이 씻어놓는 것은 손님에 대한 최고의 환대다. 사람의 신체 용모 중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을 씻어주는 ‘조용한 세례’였다. 나의 신발이 그렇게 씻겨서 물기가 잘 마르도록 가지런히 엎어져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잘 씻겨 엎어져 있는 신발을 일으켜 신을 때 손님의 기분은 얼마나 환해졌을까. 돌아가는 발길은 새 신발을 신었을 때처럼 날아갈 듯 산뜻하고 가벼웠을 것이다. “할머니는 어떻게 이런 정성스런 손님맞이를 생각해냈을까 싶어요.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풍이었을까요. 할머니 생전에 물어볼 게 많았는데 이것 역시 물어보지 못했네요.”

어릴 적 얘기가 옷고름처럼 이어진다. 얘기를 듣노라면 그 시절이 영화의 몇 장면처럼 선명히 떠올랐다가 다시 겹친다. 시간여행은 옛날과 지금 사이를 구부린 빗금으로 이어가는 것. 빗금 몇 개가 금방 그려진다.

한복 짓는 일에 남들보다 더 긴 시간 품을 들이는 그의 모습은 어릴 적 친구들의 옷을 개어놓고 뙤약볕에서 기다리던 장면과 겹쳐진다. 손님에게 맞는 옷을 짓기 위해 1mm의 오차도 그냥 넘기지 않는 깐깐함은 평생 흐트러짐 없었던 할머니와 닮았다. 뒤집어 보지 않고는 바느질 흔적이 보이지 않는 그의 한복에는 어릴 적 할머니가 날마다 비질하던 마당이 보인다. 그는 손님이 오면 제일 예쁜 그릇에다 뭘 담아낸다. 복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하라던 할머니의 말씀대로다.

그의 모든 얘기에는 어머니가 씻어 엎어놓은 댓돌 위 흰 고무신의 정갈함이 묻어 있다. 그 댓돌 위 고무신에 세상의 모든 환대가 들어 있다. 그의 모든 얘기는 환대로 끝났다. 환대는 종교와 문학의 오랜 주제였고 스토아학파와 칸트에서 호네트, 데리다에 이르는 고대~현대 철학의 뜨거운 주제이기도 했다. 그 난삽한 개념과 이론의 논점들을 40년 전 그의 할머니는 손님들의 흰 고무신을 씻어 댓돌 위에 엎어놓는 ‘미학적으로도 완벽해 보이는’ 환대의 실천으로 간단히 무질러버린 셈이다.

30년 세월을 서 대표와 함께 해온 나무자. 눈금이 많이 지워졌지만 서 대표는 다 알 수 있다.

■ 전통에 발딛고 대가들과 ‘어깨 나란히’

“어릴 적 제 모습만 알거나 지금의 제 모습만 보는 사람들은 제가 참 고생 없이 호강한다고 생각하나 봐요. 힘들었던 얘기는 친한 사람들에게만 주로 했거든요.” 1994년 가게를 처음 열고서 그는 무척 행복했다. 이듬해 봄 서울 아가씨가 신부 옷을 주문했다. ‘회색 치마, 분홍 저고리, 쪽빛 고름’이었다. 그는 ‘그런 배색은 녹의홍상(연두저고리와 다홍치마)이라는 혼례복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알려줬다. 그러자 그 ‘맹랑한’ 아가씨는 그렇게 입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는 말문이 막혔다. 그저 녹의홍상이라는 원칙만 알았지, 그렇게 입어야 하는 이유는 그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저 자신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데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죠. 도서관과 문중 등을 돌아다니면서 복식에 관한 이론·실무 자료를 찾아냈어요.” 그의 근성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전공서 등을 독파했다.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됐던 것은 바로 그의 문중 ‘대구 서씨 가례보감’이었다. 큰 문중이라 내용이 다양하고 자세했다.

당시 한복 장인들은 대부분 ‘바느질 장인’이라는 자기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부 유명 한복디자이너들은 외국인의 눈에 잘 띄는 작품을 만들면서 거품 명성에 기대는 경우도 있었다. 한복이라는 이름의 ‘한복도 서양옷도 아닌 옷’들이 횡행했다. 물론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 내지 취향의 문제다. 그러나 한복의 복식, 색채, 문양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미학적 접근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존립의 문제였다.

일본서 ‘한글 반포 기념’ 첫 전시회

“저는 ‘한복쟁이’가 아니라 ‘한복 연구가’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다지고 싶었어요. 전통의 바탕 위에서 저의 한복 작업을 체계화하고 싶었죠. 처음에는 막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저의 한복 일을 반대한 부모님께 드린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전통 없는 한복은 뿌리 없는 꽃꽂이처럼 시들 것이다. 그의 이런 의지와 고민들은 한 땀 한 땀 그의 한복에 담겼다. 전통에 바탕한 그의 야무진 한복 솜씨는 이내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1995년 8월 ‘한글 반포 550돌 기념 한글서예전·한복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던 일본 도쿄한국문화원 큐레이터 씨씨김(본명 김혜경·60, 2002년 씨씨김으로 개명)의 눈에 두 사람이 띄었다. 일본에서 활발한 서예활동을 벌이고 있던 대구의 서예가 홍강(弘岡) 이봉호 선생. 그리고 야무진 솜씨로 대구 서씨 문중의 가례보감에 따른 혼례 복식을 살려낸 서덕순 대표였다. 첫 해외전시회 초대를 받은 서 대표는 이봉호 선생에게서 받은 실물 한글 서체를 담홍치마에 그대로 옮겨 금박으로 새겼다. “한복과 한글의 아름다움이 서로 물 흐르듯 노닐며 살아나는 옷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의 한글 서체 도안은 이후 유행한 한글 타이포 패션의 선구가 된 셈이다.

전시회 큐레이터 씨씨김은 20여 년 동안 도쿄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미술전문위원과 아자부(麻布)미술관 미술연구관 큐레이터 등으로 활동하며 1988년 일본예술작가상, 1992년 문화부장관상, 1995년 문화체육부장관상·이학예술진흥상을 수상한 다양한 경력의 설치 미술가 겸 큐레이터. 죽음과 죽음의 부활로서 생명의 거대한 서사를 분출하는 그의 설치 미술은 ‘일본인의 어떤 상상력도 뛰어넘었다’는 격찬을 받았다. 이 전시회가 인연이 돼 그와 씨씨김의 20여 년 우정은 시작됐다.

이 행사는 또 한 사람과 인연으로 이어졌다. “행사를 주관한 아시아전통혼례연합회 유미 카츠라 회장을 만났어요. 이후로 그가 이끈 국제무대에 잇따라 서게 됐죠. 지역의 무명 한복 연구가인 제가 세계적인 예술가와 패션 디자이너를 만나 오늘까지 협업과 우정을 나누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패션 디자이너 유미 카츠라(桂由美)는 50여 년 동안 일본을 대표해온 ‘웨딩드레스 분야 세계 1인자’. 일본 웨딩업계의 대모로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패션쇼를 열었다. 인연은 행운만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전통 복식에 대한 고민과 이를 해결하려는 그의 당찬 근성, 학구적인 자세가 그들에게 통했던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야’…잇단 국제무대

1997년 아시아전통혼례연합회가 아시아 7개국을 돌며 무대에 올리는 아시아전통혼례문화교류대회(세계복장대회)가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한국 대표는 역시 서덕순. 그는 이 무대에서 또 한 번 근성을 발휘한다. 서울 중심으로 굳어진 성균관 혼례의 틀을 깨고 친정 ‘대구 서씨 가례보감’을 바탕으로 유희경 한국복식문화연구소장의 고증과 대구향교 전교의 조언 등을 거쳐 영남 혼례의 전범을 선보였다. 이번에도 큐레이터는 씨씨김이었다. 실제 예물과 그릇, 상 등 혼례비품 대부분을 서씨 문중에서 직접 가져왔다.

“서울의 대형 모델센터가 모델 역을 다 대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턱도 없는 소리하지 마라’며 거절했죠. 모든 라인을 미스코리아 출신 황수정과 정헌승 부부 등 지역 모델들로 채웠어요. 대구 사람 혼례는 대구 사람들이 해야죠. 대구향교 수모 네 분의 도움을 받으며 한 달간 힘든 리허설을 마치고 모델들과 함께 전세버스 꽉 채워 올라갔습니다.”

그는 이어 1998년 중국 다롄에서 열린 아시아전통혼례문화교류대회에서 한국 전통 혼례를 시연했다. 씨씨김, 유미 카츠라와 3각 공조가 큰 힘이 됐다. 이어 1999년 필리핀 전통혼례문화교류대회, 2000년 인도네시아 전통혼례문화교류대회에도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어느새 국제 규모 패션쇼·전시회의 베테랑이 돼 있었다.

1998년 8월 중국 다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전통혼례문화교류대회(혼례문화연토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서덕순(왼쪽에서 두 번째) 대표. 왼쪽부터 자티닝시 유하디 인도네시아 대표, 반다나 반다리 인도 대표, 유미 카츠라 아시아전통혼례연합회장, 제인 아이코 야마노 일본 대표.

■ 정신도 몸도 무너지려 할 때

“경력이야 오래된 편이지만, 불과 몇 년 동안에 너무 많은 일들이 닥친 거죠. 제가 치러낸 다섯 번의 국내외 대형 패션 무대는 저로서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어요. 늘 벅찰 만큼 힘들었고요. 가게 열고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 전주, 영동, 창원, 부산, 강원도 등 외지 손님만으로도 바빴어요. 손님이 늘고 대외 활동이 많아진 데다 공부해야 할 게 쌓이면서 삶이 너무 바빠진 거죠. 1995년 둘째 아이를 낳고 일주일 만에 출근했어요. 손발이 퉁퉁 부은 채로요. 국제대회를 준비하던 1996년 무렵이 가장 힘들었다 싶어요.”

공황장애 ‘공포에 갇힌 마음’

“해외 전시회마다 작품 해설 내지 주제 발표 형식의 문건을 3~4개 언어로 번역해서 설명해야 했어요. 영어에 약한 저로서는 이런 작업 자체가 악몽이었죠. 특히 발표문은 원문을 그대로 외워가야 했어요. 저로서는 불가능했어요. 너무 힘들었죠”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늦게 집에 들어와서는 잠을 줄여 공부했다. 밤새는 날이 점점 많아졌지만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혀 이대로 죽을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한테도 꼭 인정받아야 하고 지금 할 일이 이렇게 많이 쌓였는데 죽으면 안돼.’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공포 속으로 나를 몰아넣고는 그 사실이 공포스러워 다시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그런 날이 반복됐다. 공황장애였다.

약물 처방과 정신과 상담도 받았다. 별 효과가 없었다. “세상은 당신 없이도 잘 돌아간다, 걱정 마라.” 의사는 말했다. 하지만 걱정은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없는 불수의근에 딸린 무엇이었다. 그해 말 일본 전시회를 마치고 와서야 증상이 조금씩 나아졌다. 감기는 약을 먹어도 일주일 만에 낫듯이, 공황장애 역시 시간이 흐를 만큼 흘러 일이 마무리된 뒤에야 해결됐다. 몸이 힘들었지만 정신이 더욱 힘들었을 때였다. 그 덕분에, 겪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공황장애를 이해한 것이다.

허리디스크 파열…오른다리 마비

2001~2002년 박남희 선생과 함께 아시아경기대회 축하 기념전시회를 대구에서 열었다. 2003년 1월, 스키를 타러 갔다. 스키는 그가 좋아하는 유일한 취미이자 운동이다. 1년에 단 한 번인 휴가 1박2일이기도 했다. 그는 한 해 동안의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를 스키 한 번으로 풀었다. “잠잘 시간을 아껴가며 스키를 탔어요. 다음날 온몸이 뻐근하고 결리더라고요. 집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도 풀리지 않아서 스포츠 마사지를 받으러 갔어요. 불행의 시작이었죠. 스포츠 마사지를 받으면서 허리디스크를 더 다치게 된 거죠.” 무자격 마사지사는 이를 다시 치료한다며 허리디스크가 돌출할 정도로 망가뜨렸다. 극심한 허리 통증은 오히려 약과. 허리디스크 파열의 여파로 큰 신경이 눌려 오른쪽 다리가 완전히 마비됐다. 2003년 1월 응급 수술을 했다. 담당 의사는 “30~40%의 후유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수술을 하고 나자 장애가 확정됐어요. ‘6급 장애인’. 오른다리가 마치 두꺼운 스폰지 위를 걷는 것 같았어요. 재활치료를 시작했지만 평생을 절뚝이며 걸어야 하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6개월 간 모든 일을 접고 두문불출했죠.” 그는 그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끝까지 부정했다. 극도의 우울증이 덮쳤다. ‘절뚝이며’ 살고 싶지 않았다. 이를 눈치 챈 시어머니가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며느리 곁을 떠나지 못했다.

“당시 출강 중이던 영진전문대 강의실이 5층이었는데, 계단을 올라가는데 20~30분이 걸리더라고요. 학생들이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하는데 ‘내가 정말 장애인이 됐구나’ 하는 실감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돋데요. 학생들에게 대뜸 화를 내며 거절했어요.” 그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 와중에도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를 묻는 사람이었다. 답은 금세 나왔다. ‘너무 달리는 나를 쉬게 하려고 장애가 닥친 것’이었다. 당시 그는 손님이 크게 늘고 일본에 씨씨김과 같은 강력한 후원자가 있다는 사실에 고무돼 옷가게를 체인점화하고 도쿄에 지점을 내려는 중이었다. 이번 일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지점을 내기 위해 막 달리다가 IMF 외환위기 때 크게 넘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어느 날 음료수 한 통을 사들고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무자격 마사지사를 용서할 수 있었다. 허리 장애를 가진 아내를 돌보다가 익힌 기술이라고 했다. “가진 것 없이 먹고 살려다 보니 이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당신 덕에 나도 큰 걸 깨달았어요.’ 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도 직접 바느질을 한다. 보라색 깃을 만들고 있는 서 대표.

■ 한복 30년…‘옷은 몸에 대한 환대’

“1년 8개월에 걸친 재활치료는 제 인생에 친 마지막 방어선이었어요. 낙동강전투 같은 거였다고 할까요. 더 물러서면 다 무너지는…. 이를 악물고 싸웠어요. 장애의 사방 벽에 갇히고 나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데요. 고시 공부를 아쉽게 접고 가족을 위해, 특히 아내를 위해 묵묵히 바라지하고 있는 남편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난 지 17개월부터 친정어머니에게 맡긴 아들이 다시 생각났고요. 그 미안함에 아들에게 썼던 1,000통 가까운 편지도 생각났고요. 그 편지를 이제 나한테 쓸 차례였어요.”

그의 부부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1,000권의 책을 읽히기로 했다. 거의 매주 그는 아들에게 친정어머니가 읽어줄 책을 헌책 새책 가리지 않고 사서 보내줬다. 그 책갈피에는 미안한 엄마의 마음을 담아 눌러쓴 짧은 편지를 꼭 끼워뒀다. 일하다 짬이 나면 수시로 아들에게 말을 건 편지들이었다. 그 마음이 두고두고 아려서 그는 편지쓰기모임을 만들었고, 편지가족 지회장을 맡아 여러 학교에서 강연도 했다.

2010개 복낭…두르소 교수와 인연도

“2005년 재활치료가 끝났어요. 상당한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했던 의사선생님도 놀랄 만큼 좋은 상태로 회복됐어요. 재활운동을 독하게 한 결과죠. 물론 불편함은 적지 않았어요. 매일 아침 108배를 꾸준히 해온 덕에 이제는 장애를 거의 표내지 않을 정도가 됐습니다.”

그는 지금 더없이 행복하다. ‘더없이’라고 한 것은 그는 지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문관 수련을 마친 면벽 수도사처럼 웬만한 일이 닥쳐도 담담하다. “한 번은 공황장애, 또 한 번은 다리 마비가 마음과 몸을 번갈아 덮친 거죠. 그런 시련을 거치면서 이제는 몸도 마음도 편안해요.” 주인 마음이 편안하면 손님 마음도 편해진다. 그래서일까. 그의 가게에 한 번 온 손님들은 대부분 단골이 된다.

그의 가게에 놓인 함지박에는 아직 다 나눠주지 못한 복주머니(복낭)들이 오색빛으로 모여 있다. 지난 2009년 대구MBC 2010신년초대전 서덕순한복전시회에서 만들었던 복주머니의 모형들이다. 그는 이 전시회에서 2010개의 복주머니를 만들어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국회, 정부부처, 법원 등에 복을 팔아 커다란 복주머니를 마련했다. 그는 이 복주머니째 대구MBC 이웃돕기 성금으로 전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재능을 다해 복밭을 짓는다.

지난해 그는 평생을 담아가고 싶은 인연을 만들었다. 5월 3~17일 이탈리아 밀라노 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한국의 날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그는 우디네, 밀라노, 베네치아 3개 도시 순회 한국전통복식전시회와 한국전통혼례강연을 마쳤다. 이 자리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한국 문화통이자 한국문화 전도사 빈첸차 두르소(Vincenza D'Urso·60) 카포스카리(Ca’Foscari)대학 한국어·문학과 교수를 만난 것.

두르소 교수는 1980년대 서울대에서 한국학 공부를 시작해 석사과정을 마치는 동안 한국 문학과 한국 문화에 깊이 매료됐다. 지금까지 황석영 소설 ‘무기의 그늘’(2009), 고은 시선 ‘노래섬’(2009), 양귀자 소설집 ‘원미동 사람들’(2006) 등 국내 시인·소설가의 작품 10여 권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한국번역문학대상(2009), 대한민국 문화포장(2016) 등을 받았다. 고은 시인을 카포스카리대학 명예교수로 초빙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주변에서 한국 사람보다 한국어 어휘 수준이 높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 두르소 교수는 2012년 이탈리아 최초의 세종학당을 카포스카리대학에 유치해 현재까지 학당장을 맡고 있다. 은퇴 후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는 두르소 교수는 지난해 여름 두 번이나 서 대표의 한복가게를 다녀갔다.

한복학교 설립이 꿈

“지금이 더없이 행복하지만 한복의 전통, 한복의 깊은 기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의 평생의 꿈은 한복학교 설립. 한복의 전통을 제대로 찾아내고 이어받아 체계화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게 온전하게 물려주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복에 관한 젊은 재능과 꿈을 마음껏 펼치게도 해주고 싶다. 그는 ‘깨끼한복용 이음매의 박음질 방법’(특허 제 10-1660651호), ‘전통한복의 거들지 제조방법 및 그에 따라 제조된 전통한복용 거들지’(특허 제 10-1779303호) 등 2개의 특허를 등록했고, ‘착용의 용이성 및 고정력 증가의 전통한복치마’를 출원 중이다.

“한복은 몸에 대한 최고의 환대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전통 복식도 한복만큼 알뜰히 몸을 감싸지 못합니다. 일본 기모노의 ‘과도한’ 형식도, 중국 치파오의 ‘과소한’ 생략도 몸을 속박합니다. 한복은 체형에 따라, 몸의 곡선을 따라 짓습니다. ‘몸에 딱 맞게, 그러나 낙낙하게.’ 한복을 짓는 우리의 전통이 이 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한복이 품은 이 낙낙한 환대를 온 국민이 누리고 즐기고 아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 대표는 오곡을 담아 오방색 오복주머니를 만든다.

김윤곤기자 seoum@hankookilbo.com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서울역서 강릉행 KTX 타는 현송월 단장
러시아 “북미 직접 대화 러시아가 주선하겠다”
“깜언 박항서” … 베트남, 이라크 꺾고 사상 첫 ‘4강 진출’
‘애플 짝퉁’ 중국 샤오미, 진짜 애플 잡을까…기업가치 1,000억달러
취임 ‘돌잔치’에 셧다운 선물 받은 트럼프
독도새우, 숭채만두, 용금옥 추어탕… 청와대 메뉴에 담긴 정치학
승강기가 2m 아래로 '쿵'… 몸 끼였던 60대 사망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