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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생존배낭

입력
2017.11.29 15:0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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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성탄절 무렵, 평소 엉뚱한 짓 잘 하는 후배가 선물을 보내왔다. 뜻밖에도 후배가 보낸 선물은 생존배낭. 택배기사가 휙 넘겨준 것을 들고 들어오는데, 생존배낭이라 그럴까, 본래 무게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다. 후배는 휴전선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는데, 근래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도 여러 차례 있어 생존배낭을 일부러 마련해 선물로 보낸 후배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배낭 속이 궁금해 까뒤집어보니, 마음이 한없이 울가망해졌다. 생존배낭 속에는 간이담요, 양말, 핫팩, 물, 통조림, 에너지바, 초콜릿, 건빵, 손전등, 양초, 나침판 등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보며 문득 드는 생각. 이렇게 도망치듯 살아야 하나? 거기 들어 있는 나침반으로 방향을 가늠하며 꽁지 빠지도록 도망치는, 날개 없는 내 낯선 뒤태를 상상하며 갑자기 씁쓸해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 편리와 속도와 효율에 길들여진 내가 그 실속 없는 배낭을 메고 어디로 은신할 수 있을까.

이제 누림의 좋은 시간은 다 지나고 오직 견뎌야만 하는 시간만 남은 것일까.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구석기 시대 도덕률의 마지막 대변자라고 평했던, 시애틀 추장의 명연설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사랑하듯이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애틀 추장이 살던 시대보다 생태 환경이 훨씬 더 열악하고,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 사이의 도덕률의 지표도 훨씬 더 악화되었다. 오늘날 인류가 겪는 자연재해도 상당 부분은 공존공생에 대한 감도가 떨어진 인간의 극도의 이기심이 초래한 것은 아닐는지. 이제 우리는 시애틀 추장이 갈파한 바 ‘누리는 삶의 끝’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리는’ 삶, 흠뻑 삶을 즐기거나 맛보는 삶은 끝장나고 이젠 오직 아등바등 견뎌야 하는 순간들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인도네시아 발리 섬이 화산 분화 공포에 휩싸였다는데,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 서기 79년, 네로 황제의 폭정이 막을 내린 11년 후 베수비오 화산이 불을 뿜었다. 사치와 향락의 도시, 폼페이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바로 그날 아침, 불을 뿜는 화산에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평소에 자기가 추구하던 것들을 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보석, 돈궤, 경전 등 귀중한 것들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단지 지팡이 하나만을 들고 산책을 나서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늘 이 시간에 산책을 했다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미 가졌소. 당신들에게 환란은 위기이지만, 내게는 여전히 아침 산책 시간일 뿐이오.”

모두가 두려움으로 아우성치는 삶의 위기 가운데서 대체 누가 이 사람처럼 한가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아마도 자기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존재의 뿌리를 알고, 그 뿌리이신 분에 대한 불굴의 신뢰를 지닌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더러 조마조마해지는 맘 달래라고 보낸 생존배낭, 그 속에 친절하게 넣어둔 초콜릿 비스킷 따위는 꺼내먹고 나침반은 그대로 두었다. 하나뿐인 지구 밖으로 은신할 순 없으므로, 험한 일 닥치더라도 생존의 무거움 털고 가벼워지는 희망의 향방은 가늠하며 살고 싶어!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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