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은 언제든 빗나갈 수 있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인생이 뜻대로만 풀리지 않는 것처럼, 여행에도 늘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이 기다린다. 지난 4일 태백으로 떠난 야생화 트레킹에서 환희와 실망을 동시에 맛봤다. 그 실망도 사실은 투정에 가까운 자랑임을 미리 고백한다.
정선 고한읍에서 태백 땅으로 들어서는 초입, 두문동재에서 금대봉~대덕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이 무렵 뒤늦은 봄 꽃으로 뒤덮인다. 곧 여름인데 늦지 않았을까라는 의구심은 태백에 가까울수록 꽃이 피었을까라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아래서부터 치고 오르는 초록 기운이 아직 1,000m급 능선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비가 흩뿌리는 날씨에 바람까지 거세 계절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듯했다.
5월의 깜짝 설경…야생화 군락에 황홀
금대봉~대덕산 트레킹은 두문동재에서 시작한다. 두문동재는 바로 아래로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정선과 태백을 잇는 38번 국도 옛길 정상이다. 지금은 지나다니는 차량이 거의 없지만, 도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정선 고한에서 터널에 진입하기 전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옛길로 들어서는 입구가 보인다. 시작부터 지그재그로 예닐곱 차례 크게 휘어지며 천천히 오르는 길이다. 노면도 험하고 차량 성능도 보잘것없었던 시절, 고한에서 태백을 오가는 버스는 급커브와 오르막에서 빌빌거리기 다반사였고, 그럴 때면 승객들이 내려 무게를 줄여주거나 뒤에서 밀어야 겨우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상구 태백 문화관광해설사가 회고하는 그 시절 얘기다.
이른 아침, 자작나무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싱그럽다. 한 굽이 두 굽이 올랐을까, 그 눈부심이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다. 파릇파릇하게 돋아난 여린 잎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다. 봄 날씨가 아무리 변덕스러워도 5월에 눈이라니,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엄지손톱만큼 움을 틔운 잎깔나무에도, 아기 손바닥만큼 자란 사방오리나무 잎에도 소복소복 눈이 내렸다. 자연의 마술에 적응이 쉽지 않다. 초록과 순백의 부조화가 빚은 환상에 감탄사 연발이다. 길가에 핀 산괴불주머니 노란 꽃잎도 어김없이 눈에 덮였다. 그제야 정신이 든다. 이 날씨에 꽃이 제대로 피었을까?
해발 1,268m 두문동재 정상에 다다르자 바람은 더 거세졌다. 집에만 틀어박혀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의 어원이 바로 ‘두문동’이라는 안내문이 서 있다. 조선이 개국할 무렵,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고려 유신들이 개경의 두문동에 숨어 살았는데 그 중 7명이 고한 땅까지 피신해 ‘두문동’이라 불렀다. 두문동재 바로 아래다. 그들이 흥얼거린 애절한 노랫가락이 정선아리랑의 유래라고도 전해진다. 두문동재에서 시작하는 트레킹 코스는 정선과 태백의 경계를 따라 이어진다.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금대봉~대덕산 등산로는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에서 예약한 사람에 한해 하루 300명만 들어갈 수 있다. 평년에는 5월 15일부터 개방하지만 올해는 반짝 무더위가 찾아오는 등 기온이 들쭉날쭉한 탓에 지난달 20일부터 입장을 허용했다. 대덕산 정상을 거쳐 검룡소 입구까지 전체 코스(9.3km)를 걸으면 4시간 가량 걸리고, 대덕산에 오르지 않고 분주령에서 검룡소로 내려가면 약 3시간을 잡는다. 능선 주변을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고산임에도 아주 쉬운 편이다. 검룡소가 약 800m 지점이어서 전체적으로 완만한 내리막길이라고 보면 된다.
국립공원 두문동재 탐방지원센터에서 입산 패찰을 받아 목에 걸고 등산로로 들어섰다. 길 양편으로 여전히 하얗게 눈이 덮였는데, 초록 풀잎이 삐쭉삐쭉 솟았다. 하얀 눈밭에 보라색 얼레지가 군데군데 고개를 내밀고 있다. 햇살이 좋으면 꽃잎을 뒤로 활짝 젖혀 우아한 자태를 뽐낼 텐데, 갑작스런 추위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잎을 닫았다. 노란 꽃망울이 탐스러운 호랑버들에도 눈이 쌓였다.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지만 계절에 충실한 봄 꽃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수난이다.
길은 금대봉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나간다. 정상을 통과하는 등산로는 15일 이후 개방한다. 탐방예약제 안내 초소를 통과하자 고도가 조금 낮아져 주변이 제법 푸르른 모습을 드러낸다. 피지 못한 얼레지는 더 많아지고, 꽃대를 추켜세운 홀아비바람꽃도 하얀 꽃망울을 매달았다.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선 고목나무샘부터는 드디어 눈이 사라지고 바닥이 파릇파릇한 모습을 드러냈다. 내리막 계단 양편으로 파르스름한 갈퀴현호색(현호색과 비슷한데 꽃 뒤 부분이 갈퀴처럼 고부라졌다), 노랑 꽃잎이 앙증맞은 왜미나리아재비와 하얀 홀아비바람꽃이 얼레지와 어우러져 총천연색 꽃밭이다. 1000m 이상 고지에서만 자라는 멸종 위기 식물 한계령풀도 듬성듬성 섞여있다. 이 모든 꽃들이 활짝 폈다면 말 그대로 ‘천상의 화원’인데, 역시 날씨가 문제였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줘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 5월의 설경에 감탄하고 화려한 꽃밭까지 바란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그러나 기대처럼 되지 않았다고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한곳에 모여 한꺼번에 피지 않았다 뿐이지, 길 양편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야생화 천국이다. 이날 본 꽃만도 회리바람꽃, 노랑무늬붓꽃, 나도양지, 노랑제비꽃, 어수리, 선괭이눈, 꿩의바람꽃, 태백제비꽃, 홀아비꽃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7월이면 전호, 눈개승마, 노루오줌, 범꼬리 등이 또 다시 이 길을 하얗게 밝힐 것이다. 능선을 경계로 좌우의 식생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바람이 거센 정선 쪽엔 바람꽃과 얼레지 꽃대가 흔들거리는 반면, 오른편 태백 사면에는 피나물(약으로 쓰기도 하지만 실제는 독초다)이 군락을 이뤄 바닥이 온통 노랗다. 찬란한 꽃 물결에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자칫하면 밟을까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럽다.
길이 끝나가는 국립공원 검룡소 탐방지원센터 주변에는 금대봉에서 처음 발견된 대성쓴풀이 자라고 있다. 별꽃처럼 자그마해 눈을 바닥 가까이 대야만 앙증맞은 모습이 보인다. 국명(국가식물표준목록에서 쓰는 이름)인 ‘대성쓴풀’은 사실 ‘금대쓴풀’ 혹은 ‘대덕쓴풀’이어야 했다. 1993년 환경부는 금대봉과 대덕산 일대를 보호지역으로 지정하기에 앞서 2년에 걸쳐 자연자원조사를 벌였다. 당시 환경부는 고한 쪽의 대성초등학교 이름을 따 금대봉을 대성산이라 불렀다. 나중에 지역 주민들의 항의로 근거가 불명확한 대성산은 다시 금대봉으로 고쳤지만, 한번 등록한 식물 명칭은 되돌리기 어려웠다. 대덕산을 대성산으로 잘못 옮겨 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그 옛날, 이장에게 출생신고 맡겼다가 아이 이름을 엉뚱하게 등록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야생화 아니어도 최고의 트레킹 코스
사실 야생화에 관심 많은 사람이 아니면 그깟 꽃 이름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그저 걷는 길 환하게 밝혀 심심찮게 길 동무가 돼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금대봉~대덕산 등산로는 야생화가 아니어도 최상의 트레킹 코스다.
능선을 따라 걷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도 고산의 상쾌한 바람과 좌우로 펼쳐지는 산세를 맘껏 즐길 수 있다. 산은 높지만 능선은 한없이 부드럽다. 제법 평평한 지대에는 흔히 낙엽송이라 부르는 일본잎깔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40~50년 전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던 지역에 심은 나무가 수 십m 높이로 자랐다. 남부지역의 웬만한 편백 숲 못지 않다. 더구나 매끈하게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인공조림인데도 원시림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무더운 여름이면 더욱 진가를 발휘할 공간이다.
1000m가 넘는 능선까지 밭을 일궜다는 사실이 놀라운데, 트레킹 코스가 지나는 이 길을 지역 주민들은 ‘불바래기길’이라 불렀다. 화전민들이 피운 불이 어느 정도 퍼졌는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조림을 한 지형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경사가 완만하고 볕이 잘 드는 곳이다. 거기에 땅까지 비옥하니 농사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췄다.
대덕산으로 오르는 산길과 검룡소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지는 분주령은 고갯마루가 널찍하다. 태백과 정선 삼척의 상인들이 농산물과 해산물을 짊어지고 분주하게 넘나들던 고개다. 어느 방향에서 올라오든 이곳에 다다르면 무거운 짐 보따리 풀어 놓고 가쁜 숨 쉬어갔으리라. 등산객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쉼터다. 귀룽나무와 산돌배나무 하얀 꽃이 천상에 흩날린다. 꽃 바람 타고 상큼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한강발원지 검룡소까지만 걸어도 시원
분주령에서 내려가면 한강 발원지 검룡소와 이어진다. 탐방지원센터에 출입증을 반납하고 오른쪽으로 개울 건너 600m 정도 오르면 된다. 순탄하기는 이 길도 마찬가지다. 올 봄에는 비가 자주 내려 계곡 물소리까지 더욱 청량하다.
검룡소는 금대봉 기슭의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터굼에서 솟아나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솟아나는 곳이다. ‘굼’과 ‘구녕’은 모두 ‘구멍’을 뜻하는 지역 말이다. 물 빠짐이 좋은 석회암 지대의 특성이 지명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둘레 20여m의 검룡소는 겉보기에 잔잔하지만 하루 2,000~3,000톤 가량의 지하수가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다. 수온도 항상 영상 9도를 유지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검룡소에서 넘쳐흐른 물은 오랜 세월 끊임없이 암반을 깎아 바위 위에 1~2m 깊이의 물길을 만들었다. 이끼 낀 바위에 매끈하게 휘어지는 물줄기는 용틀임에 비유하기도 한다. 514km 민족의 젖줄이라 칭하는 한강 발원지에 그럴듯한 전설 하나쯤 없으면 섭섭하다. 옛날 서해 바다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고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가장 상류의 연못임을 확인하고 이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몸부림 친 자국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용틀임에서 시작한 물은 정선의 골지천과 조양강, 영월 동강을 거쳐 단양ㆍ충주ㆍ여주를 적신 후 남양주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검룡소에서 주차장까지는 약 1.3km, 시원한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순탄한 길이다. 금대봉~대덕산 전체 구간을 걷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맛보기 산책 코스다. 두문동재에 차를 대놓고 걸었다면 되돌아갈 때는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약 26km인데 3만원 정도 받는다. 미터기 요금보다 더 받는 셈이지만 빈 차로 오가는 걸 감안하면 비싸다 할 수 없는 금액이다.
태백=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