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연구자 권영민 석좌 교수
단연형식 산문체ㆍ자전적 이야기, 1936년 발표 '역단' '위독' 지목
1934년 오감도 신문 연재 때 독자항의로 30호 중 절반만 발표
최정희에 보낸 자필 연서도 발견
“十三人(십삼인)의 兒孩(아해)가道路(도로)로疾走(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오늘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4년 7월 24일 이상의 오감도 시제1호가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됐다. 이날을 시작으로 8월 8일까지 매일 한 편씩 오감도 연작이 공개됐으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때문에 시제 15호 이후로 연재는 중단됐다. 이상은 중단 직후 쓴 ‘오감도 작가의 말’에서 “여남은 개쯤 써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2천 점에서 30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며 오감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2,000점에서 골라낸 30점’이다.
권위 있는 이상 연구자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는 이 말에 착안해 이상의 시들을 연구, 오감도의 후속작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오감도의 탄생’에서 지목한 시는 1936년에 발표된 연작시 ‘역단’ 다섯 편과 1936년 공개된 ‘위독’ 열두 편이다. 다음은 1936년 2월 ‘가톨닉청년’지에 발표한 ‘역단’의 표제작 일부다. “그이는백지우에다연필로한사람의運命(운명)을흐릿하게草(초)를잡아놓았다. 이렇게 홀홀한가. 돈과과거를거기다가놓아두고雜踏(잡답)속으로몸을기입하여본다. 그러나거기는타인과約束(약속)된握手(악수)가있을뿐, 다행히空欄(공란)을입어보면도長廣(장광)도맛지않고않들인다.”
권 교수는 ‘역단’과 ‘위독’이라는 제목이 오감도와 마찬가지로 이상이 만들어낸 한자 조어라는 점, 띄어쓰기나 행의 구분 없이 단연 형식의 산문체로 구성돼 있다는 점, 모든 작품이 공통적으로 나라는 주체를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오감도와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한다.
권 교수는 이상이 소설가 최정희에게 쓴 러브레터를 최근 발견하기도 했다. 편지는 “정히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품을, 너를 니즐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구 한다.(중략)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 허트저(흩어져) 당신 잇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라며 실연의 슬픔을 절절하게 담고 있다. 권 교수는 이상이 스물 다섯 살이던 1935년 편지를 최정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최정희는 스물 세 살 이혼녀였으며 시인 백석 등 여러 문인의 구애를 받다가 나중에 시인 파인 김동환과 결혼했다. 다음은 권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_언제부터 오감도 후속작 발굴 작업을 시작했나.
“2009년에 처음 이상 전집을 냈는데 그때부터 의문을 갖고 있었다. 30점 중 나머지 15점은 어디 있을까. 수첩 같은 곳에 끄적거려 놓은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찾기 시작했다.”
_시인이 30점이라고 명료하게 밝혔는데도 미발표작을 찾으려는 연구가 전무했던 이유는 뭔가.
“작가의 말은 신문에 실린 게 아니라 이상과 절친했던 소설가 박태원(구보)의 회고록에 끼어 있던 글이다. 애초 신문에 실으려고 했으나 신문사가 거부한 걸로 알고 있다. 이상의 글이 아닌 박태원의 글로 발표된 것이라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_시인이 ‘30점’이란 말을 상징적으로 썼을 가능성은 없나.
“그렇지 않다. 작가의 말 외에도 이상 지인들의 증언이나 기타 자료를 통해 애초에 한달 연재를 염두에 뒀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_역단과 위독에는 오감도처럼 형식적 실험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시에 타이포그래피적 요소를 도입하는 등의 실험은 오감도 시제 4호에서 끝난다. 뒤에 발표된 시들은 단연 형식의 산문체이고 내용도 나를 주체로 자전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의 다른 시 중 이 같은 형식을 띤 것은 역단과 위독뿐이다.”
_이상의 러브레터는 어떤 경위로 발견하게 된 건가.
“최정희 작가의 딸인 소설가 김채원이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는 작업을 돕다가 발견했다. 이상의 친필 편지 중 연서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이상의 소설 ‘종생기’에 등장하는 정희가 최정희 작가일 거라 추정해볼 수 있다. 더불어 ‘종생기’에 대한 새로운 분석도 가능할 것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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