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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짧았던 대쪽 총리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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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짧았던 대쪽 총리 탄생

입력
2016.12.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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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신임국무총리가 1993년 12월 17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회창 신임국무총리가 1993년 12월 17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3년 12월 17일 김영삼 정부의 2기 국무총리로 이회창 감사원장이 임명됐다. 신임 이 총리는 대법관 출신으로 노태우 정권 때 중앙선관위원장을 역임하다 동해시 영등포을 국회의원 재선거가 부정시비로 얼룩지자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화로 유명했다.

법관시절, 소신판결로 인해 ‘대쪽판사’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감사원장으로 변신했고 청와대 비서실과 안기부, 그리고 군 전력증강사업인 율곡 사업에도 감사의 칼날을 들이대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회창 국무총리는 취임식 후 단호한 어조로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법 규정에 따라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통령제 하에서 총리의 실질적 위상을 세우려 했던 그와 대통령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YS와는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94년 4월, YS와 이회창은 결국 충돌했다.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안건을 두고 이회창은 총리의 사전 승인을 요구했고 YS는 이를 통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이후 총리직 사퇴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무리 대쪽이라 할지라도 대통령이라는 권력에 맞설 수는 없었다. 재임기간 127일로, 그만큼 헌법에 규정된 책임총리로서의 역할을 다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회창은 이후 야인의 길을 걷다가 정권재창출을 목표로 다시 YS와 손을 잡았다. 1996년신한국당에 입당한 그는 97년과 2002년 연거푸 대선에 나섰으나 DJ와 노무현에게 각각 패배의 쓴 잔을 들었고 2007년에는 신한국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대권 3수에 나섰으나 또다시 고배를 들어야 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현실을 맞아 국무총리의 권한과 역할이 새삼 중요해진 요즘이다. 손용석 멀티미디어부장 stones@hankookilbo.com

1993년 12월 17일, 이회창(앞줄 오른쪽) 신임 국무총리가 취임식을 마친 후 황인성 전 총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3년 12월 17일, 이회창(앞줄 오른쪽) 신임 국무총리가 취임식을 마친 후 황인성 전 총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회창 총리가 127일의 재임기간을 마치고 1994년 4월 23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를 떠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회창 총리가 127일의 재임기간을 마치고 1994년 4월 23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를 떠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1월, 이회창 전 총리가 서울 여의도 신한국당 당사를 방문, 당원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오른쪽에 같은 시기 입당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1월, 이회창 전 총리가 서울 여의도 신한국당 당사를 방문, 당원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오른쪽에 같은 시기 입당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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