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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찍은 게 미안해서” “아이에게 민주주의 보여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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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찍은 게 미안해서” “아이에게 민주주의 보여주려”

입력
2016.11.13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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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개의 빛이 한 방향을 향해 걸었다. 특정 정치세력도 이익집단도 아닌 2016년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열혈 지지자였던 60대부터 입시를 코 앞에 둔 고교생, 390㎞ 떨어진 부산에서 휠체어를 타고 올라온 장애인까지. 저마다 다른 사연을 안고 그들은 한데 모였다. 12일 밤 서울 광화문의 풍경이다.

“서민 먼저 챙기길 기대했는데… 대통령은 최순실 ‘빽’되기만” - 60대 지지자

장편환씨가 12일 오후 촛불과 피켓을 들고 경복궁 앞을 행진하고 있다. 신혜정 기자
장편환씨가 12일 오후 촛불과 피켓을 들고 경복궁 앞을 행진하고 있다. 신혜정 기자

“거기 아기엄마 촛불 꺼졌네? 이리 와봐요. 내가 줄게요.”

거무스름한 어둠이 깔려 촛불이 더 밝게 빛나던 오후 6시. 경복궁 앞 행진대열을 따라 걷던 장편환(61)씨는 주변을 연신 둘러봤다. 촛불이 꺼진 사람을 발견하면 가져 온 초를 나눠주기 위해서다. 장씨는 “박근혜 대통령을 뽑은 게 미안해서 자꾸 나누게 된다”며 멋쩍게 웃었다.

일용직 노동자인 장씨에게 지난 대선은 뿌듯함 그 자체였다. 선거일은 일감이 많은 ‘대목’이라 투표는 늘 엄두도 못 냈지만 사전투표제도가 생긴 덕분에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대통령을 뽑았기 때문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서민을 먼저 챙길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4년이 지난 지금 그의 삶은 여전히 바닥이다. 집 한 칸 없이 경기도 일대 공사장을 전전한다. 그래도 그 동안 ‘배움이 짧은 탓’이라고 자책하며 불평을 삼갔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민들은 이렇게 힘든데 박 대통령이 한 일이라곤 그림자 실세의 보호막이 돼준 것뿐이었어요. 믿음을 배신한 대통령은 반드시 물러나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ㆍ역사교과서 국정화…아이들을 아프고 힘들게 한 정권” - 30대 주부

주부 전유진씨가 12일 오후 12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광화문광장에 서 있다. 곽주현 기자
주부 전유진씨가 12일 오후 12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광화문광장에 서 있다. 곽주현 기자

“어느새 지쳤는지 곤히 잠들었네요.”

주부 전유진(33)씨는 갓 돌을 넘긴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광화문광장 한복판에 서서 시민들의 자유발언을 지켜봤다.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빨간색 피켓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구호를 외치지도 흥분하지도 않은 채 아들과 가을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 목적은 하나였다.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지라며 소리치는 이 거리, 다 같이 모여 한가지 뜻을 말하고 있는 이 현장이 바로 민주주의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이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기 위해 참여를 결심했다.

전씨는 이번 정부를 “아이들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 정권”이라고 했다.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부터 역사교과서 국정화, 국가 권력을 사유화한 ‘최순실 게이트’까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의 미래는 어두워졌다. 전씨는 “아들이 촛불을 들 일이 없었으면 하지만 혹시라도 그럴 경우가 생기면 이날을 기억하고 평화롭고 당당하게 나섰으면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취업보다 정치가 더 걱정…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나요” - 취업준비생

윤우람(왼쪽)씨와 장재용(오른쪽)씨는 민중총궐기가 끝난 13일 오후에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곽주현 기자
윤우람(왼쪽)씨와 장재용(오른쪽)씨는 민중총궐기가 끝난 13일 오후에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곽주현 기자

두 청년은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집회가 끝나고 광장에 쓰레기조차 남지 않은 13일 새벽 1시. 군대 동기인 윤우람(29)씨와 장재용(29)씨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밴드 ‘사운드 박스’의 공연을 보며 촛불을 흔들었다.

취업준비생인 윤씨는 취업보다 정치가 더 걱정이라고 했다. 윤씨는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겠지’ 하며 취업에 초조해하지 않았는데 최순실 같은 사람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보니 열심히 살아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우리는 누구처럼 내빼지 않고 당당히 군대에 다녀온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의무를 다하는 국민이 인정받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강조했다.

12일 생일이었던 윤씨는 친구들과 전주에 놀러 갔다가 문득 ‘생일인데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광화문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윤씨는 “그 동안 뉴스만 보다가 이번에 직접 가본다니까 아버지가 ‘이제 다 컸구나’라고 했다. 오길 잘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죽기살기로 대입 준비… 실세 딸 무임승차에 헛웃음만” – 고교 3년생

남승원양이 12일 오후 광화문사거리에서 ‘박근혜 퇴진’이라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김정현 기자
남승원양이 12일 오후 광화문사거리에서 ‘박근혜 퇴진’이라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김정현 기자

“부모님은 추우니까 적당히 하고 오라셨는데 생각보다 따뜻해요. 계속 있을 거에요.”

‘하야하라’라는 스티커를 붙인 얇은 패딩조끼만 입고도 남승원(18)양은 계속 에너지가 생긴다고 했다. 집을 나서면서 ‘혹시 나만 학생이면 어쩌지?’라고 고민했지만 막상 와보니 사방이 교복부대였다.

남양은 이미 자신이 원하던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해 17일 있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안 봐도 된다. 하지만 피켓을 든 순간에도 친구들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는 “친구들은 지금도 죽기살기로 노력하고 있는데 그 어려운 대학입시에 무임승차를 한 비선실세의 딸을 보니 헛웃음밖에 안 났다”고 말했다.

남양은 박 대통령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것도 용서할 수 없다. “박근혜정부가 지금 벌어지는 일도 비밀로 감추고 마음대로 조작하는데 과거 역사를 집필한다면 얼마나 왜곡될지 상상이 안 가요. 제 후배들이 비뚤어지지 않은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시민들과 함께 정권 퇴진에 힘을 모을 생각입니다.”

“운전 노동자에 부당한 현실… 부패 찌든 정권에 저항해야” - 비정규직 건설노동자

김신영씨가 12일 오후 광화문사거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정현 기자
김신영씨가 12일 오후 광화문사거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정현 기자

15톤짜리 덤프트럭을 모는 김신영(63)씨의 인생 궤적은 여느 대한민국 ‘아재’들과 다를 바 없다. 호경기이던 1990년대 초반 야심차게 사업을 시작했다가 몇 년 지나지 않아 부도가 났고, 운전대를 잡은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한가지 차이라면 20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더 용감해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부도 이후 공장, 공사장에서 운전노동자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고스란히 느꼈다. 공사가 끝나면 약속한 액수에 보너스까지 챙겨주겠다던 건설업자들은 약정 금액의 80%만 주고 내뺐다. 공사 대금을 주지 않으려 고의 부도를 내고 도망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겠다며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당신 말고도 일할 사람 널렸다”는 매몰찬 답만 돌아왔다.

홀로 아들 딸을 키우면서 김씨는 “주머니는 가벼워도 깨끗한 삶을 살자”고 다짐했다. 바르게 잘 자랐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어서다. 김씨는 “부정부패에 찌든 정권에 끊임없이 저항해야 세상이 맑아진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朴 후보 때 공약 사항 안 지켜… 장애인이 살 만한 세상 꿈꿔요” - 장애인 운동가

고숙희씨가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등급 폐지를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곽주현 기자
고숙희씨가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등급 폐지를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곽주현 기자

뇌병변장애와 언어장애가 있는 고숙희(24ㆍ여)씨는 ‘하야’라는 짧은 단어를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고씨는 서툴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박 대통령을 하야시키기 위해” 집회에 참가했다고 했다. 그를 만난 건 집회가 거의 마무리 되던 오후 11시30분. 오전 9시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와 12시간 넘게 광장을 지켰지만 힘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산 한 장애인시설에서 생활하던 그는 3년 전부터 시설을 나와 자립했다. 직업을 갖는 것도, 혼자 이동하는 것도 아직은 쉽지 않다. 모든 게 실수투성이지만 고씨는 스스로 삶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이 늘 자랑스럽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물러나야 한다. 대선 후보시절 공약한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를 지금껏 이행할 생각조차 없다. 장애 경중을 6등급으로 나눠 1ㆍ2급 장애인에만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고 성인이 된 장애인의 부양의무는 부모에게 떠넘기는 두 제도는 장애인 자립을 가로막고 있다. 고씨는 “오늘 광장에서 밤을 새우면서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겠다”며 다시 발길을 옮겼다.

“朴 대통령 실패 여성탓이라니… 성별과 부패는 아무 상관 없어” - 20대 페미니스트

심미섭씨가 12일 오후 광화문사거리에서 페미니스트 정당을 창당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김정현 기자
심미섭씨가 12일 오후 광화문사거리에서 페미니스트 정당을 창당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김정현 기자

“박 대통령이 잘못하니까 ‘여자는 그래서 큰일을 하면 안돼’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국정을 잘 운영했다면 ‘여자라서 잘한다’고 했을까요?”

심미섭(25ㆍ여)씨도 원래 다른 이들처럼 ‘하야하라’ 플래카드를 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실패 원인을 ‘여성’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을 보고 실망했다. 성별과 부패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그는 광장에 나왔다. 심씨는 “지금까지 수많은 남성 정치인이 부패를 저질러도 남성의 실패로 규정하지 않았다”며 “부패와 여성성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선택한 플래카드 문구는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는 것이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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