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전선(戰線)이라 늘 목숨이 위태롭다는 긴장감 때문에 신경은 상당히 날카로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넓게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군대라는 곳은 참 재미있는 것 같다.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남자들이 군대를 다녀오면 세상 사는 요령이 느는 모양이다.
베트남에서 통역병을 맡았던 나는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군종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군종 하사관이란 주일에 예배 드리는 일을 돕는 것을 비롯해 군 교회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한다. 그때만 해도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일에 서툴렀다.
돌아보면 군생활도 파란만장했다. 도피처로 삼았던 군대에서 오히려 큰 사고를 쳤고 엉뚱한 실수도 많이 저질렀다. 하지만 그 전의 단순히 건달 같은 생활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것을 많이 배웠다. 때문에 나는 남자라면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하는 쪽이다.
베트남에서 무사히 귀국한 나는 1971년 1월 군에서 제대했다. 그리고 그 해 봄 2학년으로 복학했다. 군대까지 다녀왔지만 공부를 가까이 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야구를 하기도 어려웠다.
베트남에서 ‘제대하면 제대로 살아야지’라고 수없이 결심했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오고 나니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사람은 한두 번의 결심만으로는 크게 변하기는 어렵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여러 차례 깨지고 후회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질적인 바탕은 조금씩 변하게 된다. 때문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진득하게 기다려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당장 변하지 않는다고 실망하면 그 사람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나는 복학한 친구들과 자주 만나 신세한탄을 했고, 베트남에 가서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허전함을 달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 인생이 나쁘게 흐를 것 같지는 않다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베트남에 가던 날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베트남에 가던 날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도 오셔서 눈물로 나를 배웅해 주셨다. 어머니는 “누가 너더러 그런 곳에 가라고 했냐? 너만 가고 싶지 않다면 얼마든지 빼주겠다. 애야, 제발 가지 마라”며 통곡을 하셨다.
어머니는 가방을 들고 계셨는데 그 안에는 돈이 가득 차 있었다. 요즘 돈으로 5,000만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내가 원하기만 하면 베트남 가는 것을 막아주시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 다녀오면 사람이 될 것 같아요”라며 어머니의 청을 뿌리쳤다.
당시만 해도 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뒤 체육교사가 되면 잘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체육교사가 싫었다.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싫다기보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학교에 갇혀 지내는 것이 답답하리라 생각됐다.
그렇지만 나는 졸업과 동시에 경기 김포군에 있던 양곡종합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좋은 선생님이 될지는 자신하기 어려웠지만 대학에서의 전공을 살려서 취직한 것이었다.
“하 선생님, 이곳 학생들 말입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순진하게만 생각하셨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그런지 공부에 별 뜻도 없고, 행동도 모범적이지는 않습니다. 하 선생님이 잘 좀 잡아 주십시오. 그래야 학교도, 선생님도 편하니까요.”
학교에 부임하기 전 인사차 들렀더니 교장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하셨다. 교장선생님은 학교 설명을 하시면서 그간 체육교사 몇 명이 학교를 거쳐갔지만 애들이 워낙 드세다 보니 결국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귀띔하셨다.
양곡종합고등학교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학교 생활을 하고 보니 고생문이 훤하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됐다.
그 학교 학생들은 유별난(?) 학생 몇 명을 제외하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인생에서 할 공부는 다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고3만 되면 어지간한 대학생과 맞먹을 정도의 ‘풍모’를 풍겼다. 겉모습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하는 짓이 그렇다는 얘기다. 화장실은 물론이고 교정 곳곳에서도 하루면 수백 개의 담배꽁초가 발견됐다.
어느 학교에서나 그렇듯 악역은 체육교사의 몫이었다. 나 역시 악역을 피할 수 없었다. 부임 후 두어 달 동안은 일부러 악역을 맡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지금 같으면 누가 해달라고 부탁을 해도 낯간지러워서 하기 힘든 일일 것 같다.
그러나 그때는 교장선생님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고, 나 또한 체육교사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무섭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고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때묻지 않은 시골 학교 아이들은 내 마음을 나보다 더 빨리 읽었다. 그리고 그들의 순진함에 내 마음도 녹기 시작했다. 점심 때 반찬을 싸다 주는 아이, 어릴 적 이야기를 해달라며 조르는 아이,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하면서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공연히 무서운 선생님만 되려고 했구나.’ 나는 그때부터 아이들과 마음을 터놓는 교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아이들 역시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진심으로 따라왔다.
부임 초기만 해도 나는 강공일변도였다. 담배를 피우다 적발된 아이들은 무조건 호되게 나무랐다. 그러나 아이들과 마음을 터놓은 뒤로는 학생 때 담배를 피우면 왜 나쁜지 조용히 타이르게 됐다.
선생으로 군림하는 것보다 친구처럼 다가가 그들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너무도 그리워서 다시 한 번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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