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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포커스] 장기하가 '한국말'에 집착하는 이유

입력
2016.07.2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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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는 지인들 사이 '문법 경찰'로 통한다. 맞춤법 틀린 걸 잘 못 참는단다. 휴대폰 문자도 띄어쓰기에 맞춰 보낸다. 두루두루amc 제공
장기하는 지인들 사이 '문법 경찰'로 통한다. 맞춤법 틀린 걸 잘 못 참는단다. 휴대폰 문자도 띄어쓰기에 맞춰 보낸다. 두루두루amc 제공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새 앨범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를 접하고 처음 든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ㅋ’라고 쓰여진 타이틀곡의 제목 때문이다. ‘키읔’이라고 읽어야 할까, ‘크’라고 읽어야 할까. 잘못 선택했다간 ‘아재’ 취급 당하기 딱 좋은 함정에 빠질 듯한 괜한 걱정까지 몰려왔다. 곡을 쓴 장기하에 직접 발음하는 법을 물어보니 ‘키읔’으로 읽어 달라는 주문이 돌아왔다.

장기하는 왜 느닷없이 둔탁한 자음을 활용해 노래를 만들었을까. 최근 서울 합정동에 있는 밴드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문득 ㅋ 만으로 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인터넷이나 휴대폰 문자를 주고 받을 때 ㅋ을 말처럼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장기하는 “대화 할 때 ㅋ을 안 쓰면 무뚝뚝해 보이고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나”며 “ㅋ이 말 같지 않은 말 중 가장 말 같은 말이 아닌가 싶었다”며 웃었다. ㅋ을 두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가장 두루 쓰는 서울말”이란 농담도 보탰다. ㅋ에 꽂힌 장기하는 노트에 ㅋ이 들어간 단어들을 쭉 써 놓은 뒤 일주일 동안 그 단어를 조합해 가사를 만들었다.

‘너는 쿨쿨 자나 봐/문을 쿵쿵 두드리고 싶지만/어두 컴컴한 밤이라/문자로 콕콕콕콕콕콕 찍어서 보낸다’.

‘ㅋ’의 노랫말을 보면 ㅋ이 행마다 별사탕처럼 박혀 운율감이 톡톡 터진다. 래퍼들이 문장의 마지막 단어의 모음을 맞춰 라임(rhyme·운율)을 살렸다면, 장기하는 자음을 맞춰 리듬감을 준 게 새롭다. 무대에서 방방 뛰며 헤드 뱅잉을 즐기는 청년 로커는 한글에 유독 관심이 많다. 장기하는 새 앨범에 “가나다라마바사”를 외친 ‘가나다’란 곡도 실었다. 21세기에 ‘송창식의 후예’가 등장한 셈이다.

“산울림 노래 듣다가 우리말의 운율감에 빠져”

장기하가 한글에 집착하는 건 “우리말이 지닌 운율의 매력 때문”이다. 시간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기하가 밴드 생활을 시작했던 때다. 홍익대 앞에서 밴드 눈뜨고코베인의 드럼 연주자로 음악을 시작한 그는 곡을 쓰며 우연히 산울림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를 듣고 “한국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란 걸 처음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노래를 듣다 운율감이 좋아 고민해 보니 가사가 다 울림 소리(모음, 자음 중 ㄴ, ㅁ, ㅇ, ㄹ)로 돼 있더라. 신기했다”며 “울림소리를 잘 활용하면 힙합식으로 말했을 때 플로우(흐름)를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장기하는 가사에 커피 같이 대체 불가능한 외래어를 빼곤 가사를 한글로만 쓰기로 마음 먹었다. 미국에서 건너 온 힙합 음악뿐 아니라 발라드 음악을 들어보면 가사에 영어가 모국어처럼 쓰이는 게 요즘 가요계 풍경이다. 영어가 한국어보다 운율감이 좋다는 인식이 창작자들 사이 깊게 뿌리 박힌 탓이다. 장기하의 생각은 반대다. “우리말의 소리가 딱딱하고 받침 때문에 뚝뚝 끊겨 운율을 만들기 어렵다고 하는 데, 무지의 소치죠.”

장기하의 음악적 지론은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노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때론 곡의 멜로디를 말의 운율에서 따오기도 한다. ‘별 일 없이 산다’(2009)와 ‘우리 지금 만나’(2011) 등이 일상 대화 속 억양을 바탕으로 멜로디를 만든 대표적인 사례다. 장기하는 “노래는 말에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한다”며 “중요한 게 가사 전달인데, 평소 대화 속 말투처럼 노래해야 듣는 사람이 더 잘 들린다고 본다”고 평소 생각을 들려줬다.

가수 장기하는 가사를 쓸 때 한글의 운율을 살리는 데 집중한다. 한글이 지닌 운율의 특징을 말하는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마치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CJ E&M 제공
가수 장기하는 가사를 쓸 때 한글의 운율을 살리는 데 집중한다. 한글이 지닌 운율의 특징을 말하는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마치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CJ E&M 제공

공군 시절 내무반 생활 옮긴 게 ‘싸구려 커피’

장기하가 곡을 쓸 때 친숙한 소리만큼 고민하는 지점이 평범한 이야기다. 보편적인 이야기 없인 공감도 없다. 그가 택한 작사 방식은 “겪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자”다. 그렇게 나온 곡이 ‘싸구려 커피’(2008)다. 장기하는 공군으로 병역을 이행할 때 내무반에서의 일을 노트에 옮겼다.

“내무실에 노란색 장판이 깔려 있었는데, 오래돼 여름만 되면 몸에 붙어 쩍쩍 소리가 났거든요. 솔직히 전 커피 안 좋아해요. 선임에게 믹스 커피를 타서 줄 때 선임이 ‘너도 마셔’라고 하니 그냥 속 쓰린 거 참고 마셨거든요. 그걸 가사에 담은 거죠. 자취 생활 얘기가 아녜요.”

장기하는 “군에 있을 때 ‘싸구려 커피’를 비롯해 ‘느리게 걷자’ 등 1집에 수록된 곡의 절반을 만들었다”며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기라 좋은 곡이 많이 나온 것 같다”며 웃었다. 장기하는 보편적인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 이야기의 일상성에 주목한다. 새 앨범에 실린 ‘빠지기는 빠지더라’도 “외투에 밴 생선 냄새가 빠지지 않아 절망했던 일”에서 나온 노래다. 선정적인 가사와 의미 없이 반복되는 감탄사 등이 남발해 노래 속에 이야기가 실종되고 있는 현실에서, 장기하는 보잘것없는 일상에서 서사를 찾아 노래의 공감대를 키운다.

“드러머 포기 한 이유는...”

겉으로는 유쾌하고 자신 만만해 보여도 속은 여리다. 장기하는 왼손에 국소성이긴장증을 앓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신체 일부에 운동 장애를 겪는 증상이다. 그가 전문 드러머의 꿈을 포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장기하가 작곡을 하면서도 무대에서 기타 연주조차 하지 않는 이유다. 그는 “군악대 가려고 시험 준비를 하는데 왼손이 나도 모르게 꽉 쥐어지면서 연주가 잘 안 되더라”며 “이 때 군악대 시험도 포기했고, 음악인으로서의 길도 포기하려 했다”는 옛 얘기를 들려줬다. 장기하는 증상의 이유를 “심리적인 압박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전문 드럼 연주자로서의 꿈을 포기한 그는 ‘싸구려 커피’를 냈던 2008년 한 지상파 방송사 보도국 국제부에서 두 달 동안 영어 기사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장기하는 강남 8학군 출신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그런 그는 ‘싸구려 커피’ 등으로 ‘루저의 대변자’로 불리기도 했지만, 일각에선 그 현상을 모순처럼 바라봤다. ‘곱게 자란’ 장기하가 루저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을까라는 의문에서다. 장기하는 “난 루저를 추구한 적도 없고, ‘B급 문화’를 추구한 적도 없다”며 “내가 고민한 건 보통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아닌가다”는 생각을 들려줬다.

장기하는 ‘가내 수공업’으로 직접 CD를 만들어 팔던 인디 음악인에서 대중적인 가수로 성장했다. 그런 그는 “새 앨범을 만들 때 초심을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새 앨범은 1집처럼 곡의 연주가 소박한 게 특징이다. 또 다른 변화도 있다. 가수 아이유(23)와의 교제다.

“말이 잘 통해요. 대화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거잖아요. 제가 A라고 말하면, 그 친구도 A라고 받아들여요. 서로 먹는 걸 좋아해 식당에서 조용히 데이트도 하고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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