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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만들기의 정치학-르네 지라르 타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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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만들기의 정치학-르네 지라르 타계에 부쳐

입력
2015.11.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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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 AFP연합뉴스
르네 지라르. AFP연합뉴스

르네 지라르가 4일 타계했다. 이 프랑스 사상가의 이름과 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1987년 출간된 김현의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를 통해서였다. 그 후 그의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책은 많이 읽었지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고 말하는 책들 중 나는 지라르 이상의 탁견을 보여준 책을 별로 알지 못한다. ‘희생양’, 아마도 요즘말로 ‘이지메’ 혹은 ‘왕따’라 불러야 할 이 끔찍한 현상에 대한 이 이상의 탁월한 분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쉽지 않을 것이다. 이후로 나는 이 탁월하고도 정교하며, 실은 대단히 서구중심적이고 가톨릭적인 분석을 기회가 닿는 대로 글에서, 강의와 강연에서 소개했다. 지라르는 누구이며, 그의 이론은 어떤 것일까.

르네 지라르는 192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났다. 지라르는 ‘15세기 후반 아비뇽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논문을 내고 파리의 명문 그랑제콜 국립고문서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의 인디아나대에서 ‘1940-1943년 미국인들의 프랑스관’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존스홉킨스대, 버팔로의 뉴욕주립대, 스탠포드대 등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쳤다.

지라르는 라캉과 데리다 등을 초청해 미국에 최초로 포스트구조주의 사유를 소개한 것으로 평가 받는 1966년 존스홉킨스대 콜로키움 ‘비평언어와 인간과학’를 주관한 인물 중 하나다. 미국에 거주함으로써 동시대 프랑스 주류 사상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대서양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던 지라르는 2005년 엄격한 회원 선출 규정으로 유명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종신회원에 선출돼 학문적 업적을 프랑스에서도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지라르의 대표작으로는 그를 문학비평가로 세상에 널리 알린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년), ‘폭력과 성스러움’(1972년), ‘희생양’(1982년), 대담집 ‘문화의 기원’(2011년) 등 30여 권이 있으며, 이들을 포함한 주요 저작 몇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지라르의 사상은 문학비평으로 시작하여 일종의 사변적 인류학을 거쳐 문화와 종교의 기원에 관한 가히 문명비평적 연구로 끊임없이 확대되며 진화한다. 초기작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모든 욕망은 모방적이다’ 곧 ‘욕망의 삼각형’의 테제를 세르반테스, 사드, 스탕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등의 문학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입증하려 한 작품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충족되면 일정기간 동안 사라지는 동물적 ‘욕구’에 비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모든 인간적 ‘욕망’은 모방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중간의 ‘매개자(매개물)’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지라르는 이를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라는 테제로 정리한다. 지라르는 이러한 ‘불변의’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아의 유치한 욕망을 ‘낭만적’이라 부르면서 ‘참다운 소설’은 이러한 ‘끔찍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우리 앞에 드러내어 보여준다고 말한다.

지라르는 대표작 ‘희생양’에서 이러한 주장을 전 인류와 문명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희생양 이론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온전히 희생양 곧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유일한 책인 그리스도교의 성서를 제외한 이제까지의 모든 책들은 가해자의 기록이다. 모든 인간사회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결정적 한 걸음에 해당되는 ‘초석적(礎石的)’ 폭력을 숨긴다. 달리 말해, 모든 인간 사회는 자신의 유지와 생존, 나아가 안정과 번영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 중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 희생자는 다수와 다른 자인 동시에 약한 자, 곧 ‘실은 죄가 없으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자이다.

이 경우 가해자들이 ‘희생양’은 ‘실은 죄가 없는 희생양’임을 인식한다면 그를 ‘희생양’으로 몰 수가 없으므로, 가해자들의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무지’는 필수적이다. 가해자인 나는 피해자가 실은 죄가 없는 자라는 것을 몰라야 한다. 이제 사회의 불안정은 이 희생양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간주되고, 전체는 희생양을 희생시킴으로써 사회의 불안정한 상태를 타개하고 나아가 안정을 도모한다. 이러한 상태는 다음 번 위기가 올 때까지 유지되지만, 위기가 발생하면 사회는 또 다시 희생양을 선택하여 위기를 넘어선다. 이것은 물론 폭력의 구조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끔찍한 진실을 직시하고 이를 ‘있는 그대로 기술한’ 가톨릭의 입장만이 진실을 적어 내려간 것이다. 성서는 예수가 아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며, 이러한 일이 결코 반복될 수 없도록 그 실상을 기록한 유일한 진리이다. ‘문화의 기원’은 바로 이러한 ‘성스러움의 초석적 폭력’으로 작용하는 ‘희생양’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오직 가톨릭의 진리, 예수만이 이러한 폭력의 만연 상태를 근본적으로 타파할 수 있는 구세주임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만이 진리이다.

서양인도 아니며, 더구나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가톨릭과 관련된 지라르의 논의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인간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바깥 혹은 안에 자기와 다른 것, 곧 ‘악’으로서의 타자를 발명하여 그에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돌리고 마치 자신은 죄가 없는 듯이 행동한다는 지라르의 통찰은 받아들인다. 지라르의 ‘타인을 악한 희생양으로 만드는’ 세상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순수’가 나와 다른 모든 타자들을 ‘불순한 악’으로 만든다는 통찰이다.

허경 대안연구공동체 파이데이아 교수ㆍ프랑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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