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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페니 샤커

입력
2017.05.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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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5.2

아페니 샤커(왼쪽)와 아들 투팍 샤커. 합합 매거진 XXL 표지.
아페니 샤커(왼쪽)와 아들 투팍 샤커. 합합 매거진 XXL 표지.

1960년대 블랙 팬서스(Black Panther Party, 흑표당) 간부로 무장조직을 이끌다 말년에는 총기 폭력 근절 운동에 앞장섰던 아페니 샤커(Afeni Shakur)가 1년 전 오늘(2016년 5월 2일) 별세했다. 향년 69세. 그의 극적인 삶이 부각된 것은 아들 투팍 샤커(Tupac Shakur, 1971~1996) 덕이 컸지만, 그의 삶 자체도 충분히 주목할 만했다.

1947년 1월 노스캐롤라이나 럼버튼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앨리스 파예 윌리엄스는 19세에 뉴욕으로 이주, 블랙팬서스 당원이 되면서 개명했다. 아페니 샤커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쯤인 아랍어. 그는 뉴욕 할렘지역의 블랙팬서스 지역장이 됐고, 동료 활동가였던 빌리 갈런드(Bliiy Garland)와 투팍을 낳았다. 69년 4월, 임신 중이던 그는 당원 20명과 함께 뉴욕 폭탄테러 모의 혐의로 체포됐다. 최장 300년 형이 가능한 혐의였지만 “변호사에게 돈을 지불하느니 차라리 옥살이를 하자”며 스스로를 변호, 8개월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투팍이 태어난 건 71년 6월, 출옥한 지 한 달만이었다.

68년과 75년 루뭄바-무툴루 샤커 형제와 결혼해 살면서도 내내 인권운동가로 바빴고, 한동안은 가난한 마약중독자로 지냈다. 84년, 13살의 투팍이 뉴욕의 한 연극팀(127th Street Ensemble)에 들어가 예술적 재능을 키우게 된 것도 당장 잠잘 곳이 필요해서였다. 당시 샤커 모자는 노숙자였다. 작곡가 겸 래퍼로, 배우와 프로듀서로 빛나는 길을 개척하면서도 끊임없는 폭력과 성폭력, 마약으로 방황하는 아들의 삶이 그를 각성시켰다. 마약을 끊은 어머니와 화해한 뒤 투팍이 지어 부른 1995년 노래가 ‘디어 마마(Dear Mama)’였다.

투팍이 권총으로 살해된 뒤 아페니는 총기폭력 근절 활동에 앞장섰다. 아들의 유산으로 음반회사(Amaru Entertaniment, Inc)를 설립, 수많은 유작 음반을 제작ㆍ발매했고, 아마루 샤커 재단을 설립해 가난한 청년들에게 예술을 가르쳤다. 2003년에는 의류 브랜드 ‘매커벨리(Makaveli)’를 만들어 수익금 전액을 재단 운영에 썼다. 흑인 인권운동의 산 증인이자 명연사로서 활동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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