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의 스티커가 도시가스 분배기 덮개에 빼곡히 붙었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한 문자들은 대로변 교통신호 제어기나 전봇대, 뒷골목 쪽문에도 경쟁하듯 모여 있다. 젊음의 거리 홍대 앞을 비롯해 합정 이태원 압구정동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눈에 띄는 스티커의 아우성, 도대체 너희 정체는 무엇이냐.
#홍대 앞 정체불명의 스티커
szler, dtqs, DIMZ, KHARON…
‘검색해도 안 나오는’ 생소한 문자 대부분은 그래피티(Graffiti) 작가나 인디밴드(Indie band) 등 독립 예술인들의 활동명이다. 간혹 비디오아티스트와 설치미술가의 이니셜도 보이고 뉴욕이나 런던 뒷골목에 붙은 것과 동일한 스티커도 눈에 띈다.
스티커를 붙이는 이유를 물었다. 거리 미술가 A씨는 지난달 27일 “대중 홍보 목적도 있지만 예술인들끼리 소통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설명했다. 하나 둘 모여 군락을 이룬 스티커마다 ‘무리 속에 속했다’는 그들만의 만족감과 경쟁심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스티커를 붙이는 것 자체를 예술 행위로 보기도 한다. 그래피티스트 B씨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 공간이 필요한 그래피티 작업에 비해 손쉽게 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일종의 ‘인스턴트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최근 인디 등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늘고 있는 만큼 스티커도 예술의 한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10년 전부터 스티커를 붙여온 그래피티스트 C씨의 전망이다. 그러고 보니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스티커가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룬 느낌도 든다.
홍대 인근에 거주하는 김민경(21ㆍ여)씨는 “프렌차이즈 매장이 난립하면서 이 지역만의 개성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는데 그나마 스티커 덕분에 다양성이 존중받는 ‘홍대스러움’이 유지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중의 관심보다 그들끼리 존재를 증명하거나 소극적 저항의식 표출을 중시해 온 이들은 스티커에 대한 관심 자체를 경계했다. 거리 미술가 D씨는 “과도한 관심은 왜곡된 인상을 만들고 다양한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스티커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나만의 스타일을 계속 업그레이드 하는 과정”이라는 외국인 그래피티스트부터 특별한 의미 없이 “그냥 붙인다”는 작가들까지 스티커를 붙이는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본인의 인적 사항만은 하나같이 밝히길 꺼렸다.
#논현역 먹자 골목의 인력소개업체 스티커
알록달록한 홍대 앞 스티커에 비해 요식업 점포가 밀집한 강남구 논현역 먹자골목의 스티커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대부분 ‘OO인력’ ‘이삿짐’ ‘휴대폰 소액결제’등 굵은 글씨 아래 큼지막한 전화번호가 빠지지 않는다.
투박해 보이는 인력 스티커엔 불황에 허덕이는 자영업자의 현실이 담겼다. 이 지역 한 인력소개 업체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부근에 폐업하고 새로 들어오는 점포가 많다 보니 인력 수요가 많다. 곳곳에 붙인 스티커를 통해 연락이 꽤 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중개업자 고모(57ㆍ남)씨는 “작년 이맘때보다 임대 매물이 늘고 인력이나 철거 전단이 많아진 것으로 볼 때 점포가 들어섰다 빠지는 주기가 빨라졌음을 알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인근의 크고작은 공사현장에도 인력 스티커는 빼곡하다. 공사 진척에 따라 그때그때 필요한 건설인력을 확보해 쓰는 까닭에 구직자들도 스티커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화려한 유흥가의 뒷골목에 덕지덕지 붙은 인력 스티커마다 누군가의 절실한 하루 벌이가 달려 있다.
#흑석동 대학가의 빈 방 광고 전단
개강을 코앞에 둔 대학가에선 빈 방을 해소하려는 집주인들의 막바지 홍보전쟁이 치열하다. 지난달 27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학교 주변, 깔끔한 도안과 매끈한 용지 대신 손수 만든 전단에 풀을 먹여 붙인 수제 스티커가 담벼락마다 게시판마다 빼곡했다. ‘방 있습니다!’ ‘원룸’ ‘투룸’ ‘하숙’등등, 좁은 골목을 따라 스티커의 아우성은 계속됐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부동산 중개 어플리케이션이 대세라는 요즘 담벼락 스티커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 지역에서 20년 동안 임대업을 해 온 김모(68ㆍ남)씨는 “인터넷이나 휴대폰으로 연결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지만 우린 사용법을 몰라서 부부가 함께 전단을 붙이러 다닌다”고 말했다.
비슷비슷한 스티커들 사이에서 튀어 보이기 위한 전략도 다양하다. 빨강 노랑 파랑 등 컬러 용지를 사용하거나 ‘정문 1분’ 또는 ‘풀옵션’과 같이 입지조건과 편의시설을 내세우는 건 기본이다. 아예 ‘싼 방’임을 강조하거나 내부 사진을 인쇄해 붙이기도 한다. 이 지역에서 10여 년간 하숙을 해 온 신모(57ㆍ여)씨는 “그래도 방학 때는 스티커 보고 전화하는 경우가 아직 많다”고 말했다.
#꽃벽 된 차벽
매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 긴 꽃벽이 선다. 꽃벽은 경찰의 차벽에 대한 저항이다. 지난해 11월 제4차 촛불집회 때 시민들은 행진을 막아선 경찰버스에 폭력 대신 꽃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총 십만 개 이상의 꽃 스티커가 차벽을 꽃벽으로 바꿔놓았다.
당시 꽃벽을 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일부 시민들이 스티커를 제거하느라 휴일에도 쉬지 못할 의경들을 걱정하며 스티커를 떼어냈고 평화시위의 대표적 사례로 여겨지기도 했다. 반면, 이에 대해 ‘착한 시민 강박증’이라는 비판도 일었다. 직접 스티커를 붙인 당사자들은 저항할 권리를 침해당한 현실을 불편해 했다. 꽃벽 자체가 부당한 공권력을 미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탄핵 찬ㆍ반 집회가 열린 지난달 25일 스티커 꽃벽은 하나로 결집한 촛불 민심을 상징하며 거리에 늘어섰다. 선명했던 꽃 색깔이 바랬고 스티커는 군데군데 찢겨 떼어졌지만 그 상태 그대로 민주주의의 생명인 다양성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권도현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