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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내가 즐거워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입력
2016.11.0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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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거워야지 세상도 바꿀 수 있어요.” 연전에 지쳐있던 필자에게 한 선배 학자께서 해주셨던 말이다. 맞다. 내 안에 즐거움이 있어야 뭔가를,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꾸준히 해갈 수 있고, 그래야 바꿀 수 있게 되는 듯싶다.

‘논어’는 첫 구절부터 공명이 되지 않는 말로 시작된다. “배우고[學] 때때로 익히면[習]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가 그것이다. 여기서 혼동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이 말은 배우고 익힘으로써 얻게 되는 좋은 결과, 그러니까 공부를 잘해 얻은 소득 때문에 기쁘다는 뜻이 아니다.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가 기쁨의 원인이 된다는 통찰이다.

달리 말해 공부라는 활동 자체가 기쁨을 유발하는 원천이라는 뜻이다. 삶이 나를 버겁게 해도 공부에서 위안을 얻으며, 사회가 나를 속여도 공부를 하면 즐거워진다는 얘기다. 하여 공부로 인한 즐거움은 권력이 없고 돈이 적다고 하여 줄어들거나 사그라지지 않는다. 짓쳐 드는 노쇠함도 그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한다. 그러니 어찌 쉬이 공명할 수 있겠는가. 힘과 돈의 결핍, 노쇠함의 엄습 속에서도 독서와 사색, 실천 등으로 즐거울 수 있다는 주장이니 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평생 배우고 익혀야 한다. 공부가 즐거움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고, 힘이 없거나 돈이 없어도 또 노쇠해도 할 수 있기에 그렇다. 배우고 익힌다고 하여 무슨 학원이나 강좌, 학교 같은 데를 다녀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중국 명대 철학자 왕양명이 공자의 권위를 업고 “사상마련(事上磨鍊)”, 곧 “일함을 통해 공부한다”고 단언한 까닭이 이것이다. 불교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불법을 깨칠 수 있다고 한 연유도 마찬가지다.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든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했기에 그렇다.

다만 ‘로봇의 학습’이어서는 곤란하다. 생계유지에 필요한 학습이 얼추 됐다고 하여 학습을 멈추면 로봇 같은 삶에 빠져들게 된다. 누군가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입력하지 않은 한, 일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굴러간다. 당연히 배우고 익힘으로 인한 즐거움도 유발되지 않는다. 이러면 절대 안 된다는 얘기를 함은 아니다. 우리는 생활인임과 동시에 사회인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는 제안이다. 생계를 돌보는 어른이자 민주주의 사회서 사는 시민임을 잊지 말자는 소리다. 어른이자 시민으로서 살기 위해선 배우고 익힘을 통해 스스로를 꾸준히 제고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그래야 우리가 어른이자 시민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것을 잃지 않게 된다. 잃어버린 민주주의 얘기다. 우리 것을 빼앗겼음에도 우리는 “사는 게 뭐 다 그렇지” 하며 외면해왔다. 그것을 앗김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큰 불편을 겪고 손해를 봤는지를 굳이 따지려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민주주의를 강탈한 세력은 담대해져 갔고 기고만장해졌다. 걸핏하면 권력을 동원해 시민을 짓눌렀고 윽박질렀으며 심지어 가르치려 들기까지 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현하자는 노력을 “그게 내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하며 등한시했기에 초래된 결과다.

작금의 사태도 그래서 벌어졌다. 다만 유의해야 할 바는, 어른이자 시민으로서 우리가 잃은 것은 ‘박근혜’란 개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순실로 대변되는 세력에게 빼앗기고 농락당한 것은 ‘박근혜’가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다. 따라서 우리가 되찾아서 다시 세워야 하는 것은 ‘박근혜’가 아니라 민주주의다. 또한 민주주의의 터전인 성숙한 시민 의식과 고양된 정신이다.

이를 위해선 ‘나’ 안에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다. 익히 경험했듯이, 물질이나 권력을 가진 저들은, 자신이 지닌 것을 지키기 위하여 집요하게 굴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민심의 성난 물결에 동참하는 것은, 최순실 등에게 민주주의를 빼앗겨서가 아니라 ‘대통령’ 박근혜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되찾는 순간,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민주주의를 무시하며 팽개치려 들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한 공공선의 진전보다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앞세우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 맞서 우리가 들 수 있는 무기는 양식(良識)과 상식(常識)이다. 어른이자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양식과 상식이 우리 삶의 토대가 될 때 민주주의도 지속 가능하게 실현될 수 있다. 다만 양식과 상식을 우리 삶의 기초로 쌓아가는 일은 성가시고 지루하다. 이득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삶과 사회가 바뀌지도 않는 듯하다. 그렇다고 그만두면 결국 민주주의를 지금처럼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각자의 삶터에서 양식과 상식을 바탕으로, 어른이자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이라도 해가는 것이 소중하다. 이런 활동이 모이면 삶과 사회를, 또 세상을 바꿔 갈 수 있게 된다. 내 안에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이 성가시고 지루한 길을 지치지 않고 걸어가려면, 무엇보다도 내가 즐거워야 하기 때문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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