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승준 기자

등록 : 2018.01.06 04:40

[나를 키운 8할은] 루시드폴 "난 '들국화 키드'"

귤 농사 짓는 음유시인의 음악 밑거름

등록 : 2018.01.06 04:40

가수 루스드폴은 1996년 록밴드 미선이로 활동했다. 중학생 땐 들국화 음악에 빠져 살았다. 음악 농부에겐 로커의 피가 흐른다. 안테나뮤직 제공.

전 제주입니다. 지난달 31일 마지막으로 공연 ‘읽고, 노래하다’를 마치고 집에서 숨을 돌리고 있습니다.

귤 수확도 거의 끝냈고요. 지난해 10월 ‘모든 삶은, 작고 크다’를 낸 뒤 두 달 동안 원 없이 읽고, 노래했습니다. 가을과 겨울에 걸쳐 참 행복했네요. 새해 시작도 좋습니다. 대구 공연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늘길에 무지개가 떴더군요. 오른손을 창 옆에 대보니 빛이 반사돼 손등에 무지개가 핍니다.

옛 얘기를 시작해볼까요? 중학교 2학년, 1989년이었던 것 같아요. 반에 록밴드 들국화의 노래 ‘북소리’를 따라 부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앨범 ‘추억 들국화’(1987)에 실린 첫 번째 수록곡이었죠. 밴드 해체 후 전인권 선배님과 허성욱(1962~1997) 선배님 두 분이 낸 앨범이기도 하고요. 전인권 선배님 목소리가 정말 독특하잖아요. 친구가 성대모사 하듯 불렀는데, 끌리더군요.

친구 녀석한테 결국 카세트테이프를 빌렸습니다. 집에서 듣는 데 처음엔 놀랐습니다. 웃기는 음악이 아니라서요. 카세트테이프 B면에 있는 ‘어떤...(가을)’이 특히 좋았습니다. “낙엽이 떨어지고 설레이고 우~ 답답하고”라며 시작되는 노래인데,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 스타일이었죠. 록 음악에 묻어나는 재즈 분위기에 후렴구 전자기타 솔로… 그 기타 리프가 아직도 생생해요. 그때 통기타로 진짜 많이 연습했거든요. 지금도 이 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요.

‘추억 들국화’에 빠져 들국화 2집 ‘너랑 나랑’(1986)을 산 뒤 ‘들국화 라이브’(1986)를 샀어요. 보통 ‘행진’이 실린 1집 ‘행진’에 빠져 들국화 음악을 듣고 좋아하기 시작하는데, 전 역순으로 갔죠. 라이브 앨범을 듣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말로 노래하고 우리 노래를 연주하는 데 이 이상은 있을 수 없겠구나’라고요. 그때 들국화 같은 음악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꿨죠.

어떤 점이 좋았냐고요? 글쎄요, 모든 게 완벽했단 말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때 전 ‘들국화 키드’가 됐죠. 록밴드 미선이로 활동할 때 들국화 곡을 많이 연주하기도 했죠. 믿기 어려우실 테지만 ‘제발’도 불렀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포크 듀오 어떤 날이나 밴드 산울림 키드인 줄 아시는데, (유)희열이 형이 어떤날 키드였고, (장)기하가 산울림 키드였죠. 고1때 집 근처에 들국화 마지막 콘서트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걸 보고 꼭 가려고 했는데, 결국 놓쳤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재결합하지 않을까란 기대를 품고 아쉬움을 달랬죠.

들국화의 최성원 선배님을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에서 장기 공연할 때 우연하게요. 전 동네 음반 가게에 가서 어떤 가수의 카세트테이프가 새로 나왔는지를 보는 게 취미였습니다. 여러 여성분이 가게로 와 ‘제주도의 푸른 밤’이 실려 있는 최성원 선배님의 카세트테이프 들어왔냐고 묻던 풍경이 떠오르네요.

중ㆍ고교 시절엔 예스나 핑크 플로이드를 비롯해 뉴트롤스 같이 프로그레스 록 장르의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이 팀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드럼 소리가 굉장히 건조해요. 리버브(울림) 없이 딱딱한 소리가 나죠. 요즘엔 너무 정교하고 매끈한 것보다 투박한 소리에 더 끌립니다. 제 새 앨범 수록곡 ‘안녕,’을 들어보세요. 1970년대 만들어진 드럼으로 녹음해 소리가 둔탁하거든요. 들국화를 좋아했던 시절 들었던 음악의 영향을 이제야 받는 것 같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에게도 뭘 듣고 자랐느냐가 중요하니까요.

이 얘길 꺼내니 1993년에 자작곡 ‘거울의 노래’로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에 지원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본선에 가면 지원자 인터뷰를 해요.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하고 싶냐고 묻기에 “제가 음악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을 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죠.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당돌했다 싶어요.

그땐 참 대단했어요. 본선 끝나고 연회를 갔는데 김민기 선생님이 술을 따라 주셨고, 김광석(1964~1996) 선배님이 사회를 봤죠. 광석이 형 웃을 때 광대뼈 올라가는 그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어린 마음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싶었어요. 다들 존경했던 음악인들이었으니까요. 아, 결과요? 제가 대회 본선에서 꼴찌(동상 수상)였을 거예요.

중학생 때부터 기타를 쳤고 들국화를 좋아했지만, 고등학생 때는 밴드 활동을 하진 않았습니다. 학교에 밴드부도 없었고요. 대학 가면 뭐라도 해야겠다며 버텼죠.

대학에도 막상 들어가니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메아리라는 노래패에 들어갔는데 대중가요 부르면 안 된다 등 생각보다 제약이 많았어요. 선배들 눈치를 보다가 두 달이 지났을까, 해방가요제가 열린다는 거예요. 건반 치는 친구와 저보다 노래 잘하는 친구를 섭외해 3인조 팀으로 나갔죠. 그런데 웬걸요. 단과대 별로 나와 “투쟁!”을 외치면서 난리도 아닌 거예요. 민중가요제였던 거죠. 저희 팀 노래가 ‘일기장에서’이었던가 그랬는데, 가요제 끝나고 동아리방 가니 저를 보는 선배들의 시선이 따갑더라고요. 가요제 사회자 형도 우리를 “X세대가 나오셨군요”라며 약간 냉소적으로 소개했던 것 같아요. 자격지심일지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가요제란 가요제는 다 찾아 다녔죠.

숱한 고배를 마시고 도전한 프로젝트가 미선이었습니다. 1996년 3월 1집 ‘미선이’를 냈죠. ‘내 가 가야 할 길이 없구나’라며 의기소침했을 때 만든 밴드였죠. ‘치질’이란 노래에서 ‘휴지 같은 너희들 종이(신문) 사지 않겠어. 단돈 300원도 주지 않겠어’라고 했는데 그 신문값이 이젠 800원이 됐네요, 하하하.

<가수 루시드폴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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