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Enter, 현장] "낡아도 불편해도 좋아" LPㆍ카세트에 빠진 청춘들

알림

[Enter, 현장] "낡아도 불편해도 좋아" LPㆍ카세트에 빠진 청춘들

입력
2016.06.20 16:09
0 0
18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린 서울레코드페어에서 걸그룹 원더걸스의 팬들이 신곡 LP를 구매한 뒤 들고 있다. 서울레코드페어제공
18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린 서울레코드페어에서 걸그룹 원더걸스의 팬들이 신곡 LP를 구매한 뒤 들고 있다. 서울레코드페어제공

경남 창원시에 사는 주세욱(49)씨는 지난 18일 오전 7시30분 쯤 서울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를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걸그룹 원더걸스의 신곡 ‘아름다운 그대에게’가 실린 LP를 서울레코드페어에서 사기 위해 나름 서두른다고 왔는데, 이미 30여 명이 행사장 앞에 대기하고 있어서다. 행사 하루 전인 17일 서울로 올라와 고속버스터미널 인근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온 그는 ‘34’가 적힌 대기표를 받았고, 오전 11시 장터가 문을 연 뒤 원더걸스 LP 두 장을 샀다. 주씨 옆에는 300번 대의 대기표를 받은 직장인 홍모(26)씨가 원더걸스 LP를 사지 못할까 걱정하며 서 있었다. 집에 LP플레이어가 없다는 홍 씨는 “소장용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500개 한정반으로 체코에서 제작된 원더걸스의 LP는 이날 행사 시작 후 세 시간이 채 안 돼 동이 났다.

원더걸스의 ‘아름다운 그대에게’는 이르면 이달 말 발매 예정인 새 앨범에 실릴 곡이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음악 유통이 CD에서 디지털 음원 시장으로 재편된 가운데 가수가 신곡을 음원이나 CD가 아닌 LP로 먼저 공개하기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SM엔터테인먼트와 JYP엔터테인먼트 등 대형기획사 소속 아이돌 그룹이 신곡을 LP로 먼저 공개하는 건 2000년대 들어 처음이다. 가수 김동률과 보이그룹 인피니트 등이 LP를 발매한 적은 있지만, 모두 음원 사이트에 음원을 공개하고 난 뒤였다.

하지만 원더걸스는 LP를 통한 신곡 공개란 이색 행보로 팬들을 온라인 음원 사이트가 아닌, LP 장터로 불러 모았다. ‘텔미’, ‘소핫’, ‘노바디’ 등의 히트곡을 내며 복고를 그룹의 주요 콘셉트로 내세운 원더걸스다운 전략이다.

박화영(19·왼쪽)씨와 조한나(30)씨가 인디 음악인 코가손 등의 카세트 테이프를 산 뒤 기뻐하고 있다. 박씨는 "카세트 테이프를 뒤집어 가며 돌려 듣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박화영(19·왼쪽)씨와 조한나(30)씨가 인디 음악인 코가손 등의 카세트 테이프를 산 뒤 기뻐하고 있다. 박씨는 "카세트 테이프를 뒤집어 가며 돌려 듣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아이돌그룹이 CD와 음원에 밀려 골동품 취급을 받는 LP로 신곡 홍보를 한다는 건 LP문화의 저변 확대를 의미한다. 클래식이나 재즈 혹은 인디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졌던 LP가 주류 아이돌 시장까지 부활의 불씨를 옮겨 붙이고 있는 셈이다.

대중문화에 불고 있는 복고 열풍은 LP와 함께 과거 속으로 사라졌던 카세트 테이프에 대한 관심까지 소환했다. 올해 6회를 맞은 서울레코드페에서는 처음으로 ‘카세트 테이프 특별전’을 열었는데, 빅베이비드라이버 트리오, 푸르내, 코가손 등 인디 음악인들의 카세트 테이프 1,000개 중 800여개가 팔렸다. 현대카드는 최근 이태원에 음반 매장 ‘바이닐 앤 플라스틱’을 열면서 카세트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따로 꾸려 눈길을 끌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30~40대에겐 향수를 주고, 10대에겐 옛날에 카세트 테이프로 이렇게 음악을 듣기도 했다는 음악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이태원에 최근 문을 연 현대카드 음반 매장 '바이닐 앤 플라스틱'에는 카세트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양승준 기자
이태원에 최근 문을 연 현대카드 음반 매장 '바이닐 앤 플라스틱'에는 카세트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양승준 기자

중년층 이상의 추억놀이로만 LP와 카세트 테이프가 소비되진 않는다. 서울레코드페어에서는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들이 40대 이상 중년층보다 더 많이 눈에 띄었다. 10~20대에게 LP와 카세트테이프 구매는 신선한 ‘아날로그 놀이’였다. LP와 카세트 테이프가 돌아가며 내는 지직 대는 혹은 둔탁한 소리에 따뜻함을 느끼는 이들도 물론 있었지만, 이날 만난 많은 청춘들은 “음악의 소유”에 더 의미를 뒀다. 인터넷 스트리밍 방식으로 흘려 버리듯 소비하는 디지털 음원과 달리 직접 LP와 카세트 테이프를 틀고 보유하는 체험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CD 커버보다 크고 화려한 LP 표지 디자인에 반해 LP를 산 10~20대도 적지 않았다. 행사장에서 만난 10~20대 LP 구매자 6명은 모두 LP플레이어가 없었다. 록밴드 라디오헤드와 9와숫자들의 LP를 산 고등학생 윤정민(16)양은 “LP가 CD보다 있어 보이지 않나”라며 솔직하게 말했다. 인디 음악인 코가손의 카세트 테이프를 산 고등학생 장석진(16)군도 “카세트 테이프가 흔하지 않아 소장하고 싶었다”며 “내 손에 쥐고 음악을 듣는 게 끌렸다”고 말했다. 접속의 시대 ‘소유의 종말’을 예측한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의 주장과 달리,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음악의 소유에 더 가치를 두는 10~20대가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원더걸스 멤버 선미는 “점점 차가워지는 시대에 LP로 따뜻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데뷔 후 처음으로 신곡을 LP로 낸 소감을 전했다. 서울레코드페어를 기획한 김영혁 김밥레코드 대표는 “카세트 테이프에 대한 반응이 좋아 내년엔 특별전을 더 확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18일과 19일 이틀간 열린 서울레코드페어에는 8,000여 명이 다녀갔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음악팬들이 서울레코드페어에서 LP를 고르다. 서울레코드페어 제공
음악팬들이 서울레코드페어에서 LP를 고르다. 서울레코드페어 제공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