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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15> 노력 없는 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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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15> 노력 없는 고수는 없다

입력
2011.01.2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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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연말이었다. KBS 연기대상 담당 PD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하 위원님, 이번 시상식 때 출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사실 부담이 컸다. 무슨 심사라도 맡아 달라는 부탁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연기의 '연' 자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연기자들을 평가한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심사가 아닌 당시 인기사극 '용의 눈물'을 콩트화한 극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이었다.

"아이 참, 드라마에 나갈 얼굴이 있고 나가서는 안 될 얼굴이 있는데 누구 망신시킬 일 있습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나는 드라마에 나가기 어려운 얼굴이에요." 하지만 담당 PD는 굽히지 않았다.

"하 위원님,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 하륜 역을 맡아 주시면 됩니다. 정승이죠. 또 따지고 보면 하 위원님의 조상님 아닙니까?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좀 해 주시죠. 자 어서 분장실로 가시고…. 대본은 여기 있습니다. 글자가 좀 많지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냥 야구해설 하시는 것처럼 편하게 해 주세요. 분위기 봐서 애드립도 좋습니다."

PD는 막무가내로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분장실로 들어갔다. 분장을 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낯익은 탤런트들이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하 선생, 우리 밥줄 끊으려고 오셨소?" "아니, 하 대감 아니십니까? 이거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하 정승, 이게 도대체 얼마 만입니까."

태조 이성계 역을 맡은 황수관 박사를 비롯해서 탤런트 유동근씨 등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그들은 브라운관을 통해 비쳐지는 근엄한 모습과 달리 친절하고 자상했다.

녹화 전 사람들은 이런저런 농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도 긴장을 풀고 금세 분위기에 녹아 들었다. 하지만 녹화에 들어가자 순식간에 500년 전 사람들로 변했다. 조금 전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태종 이방원, 조영무만 있었다.

황수관 박사나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순식간에 저렇게 변할 수 있는지 놀라서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나는 그날 녹화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것이 무엇이고, 또 프로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는 고수가 참 많다. 그런 반면에 노력도 하지 않고 최상의 결과만 바라는 하수들도 있다.

나는 영화감독 이장호와 가까운 친구 사이다. 이 감독은 평소에는 털털하고 소탈하고 재미있는 친구이지만 일에서만은 무서울 정도로 프로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이 감독이 함께 식사나 하자고 해서 나갔는데 다짜고짜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 위원, 이거 큰일났어요. 정말 큰일이요.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 감독,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인데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요?"

이 감독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야구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야구를 전혀 몰라요.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2루수가 공을 잡으면 2루타, 3루수가 잡으면 3루타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2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요?"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야구를 안 본 사람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2루수가 공을 잡으면 2루타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까. 솔직히 '이 감독에게 이런 무식한 면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아하, 그래서 나를 만나자고 했군요." "그렇습니다. 하 위원이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이 감독이 만든 영화는 장안의 화제가 됐던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은 정말 멋진 야구영화다. 이 감독은 자기 일이라는 확신이 생기면 물불도 밤낮도 안 가린다. 오로지 일에 매달려 확실하게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나는 그래서 이 감독을 좋아하고, 또 그가 만든 영화를 좋아한다.

야구가 없는 겨울철에 나는 늦잠을 즐긴다. 오전에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아내가 받아서 용건을 메모해 둔다. 어느 추운 겨울 새벽이었다. 담당 PD가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다. 당장 방송국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아무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오?" "하 위원님, 오늘 광주로 내려가서 김응용 해태 감독 인터뷰 한 꼭지 따오랍니다."

방송에서 말하는 한 꼭지라는 것은 짧으면 1분짜리다. "아니, 고작 그 일 때문에 나더러 지금 당장 광주에 내려가라는 겁니까? 그 정도라면 기자나 PD도 할 수 있고, 광주방송총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무슨 죄입니까? 팬들, 시청자들에 대한 서비스라 하 위원님께서 직접 가셔야 한답니다. 그래도 하 위원님이 직접 뛰어 주셔야 프로그램이 살지 않습니까? 오늘 광주 다녀온 뒤에 저녁에 바로 편집하고 내일 아침에 방송 나갑니다. 좀 도와 주십시오."

그래도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머나먼 광주까지, 그것도 추운 겨울 새벽에 차를 타고 내려가서 김응용 감독의 고작 1분짜리 인터뷰를 따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속에서 불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나를 태운 차가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한 순간 마음의 분노는 봄눈 녹듯 녹았다. 내 생각이 짧았다고 반성했다. 나는 혼자이지만 시청자는 수백만이다. 수백만 프로야구 팬들을 위해 내 한 몸 고생하는 게 대수냐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한다면 자기 일만은 철저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김응용 1분짜리 인터뷰' 이후 나는 내 일에 더 철저하고 충실하려고 애쓴다. 노력 없는 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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