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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환자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희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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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환자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희망’이죠”

입력
2018.06.05 17:38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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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치과 치료 자원봉사

故 선우경식 원장 정신 이어

“제가 어렵게 자라 사정 알아요”

지난 달 31일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만난 임창준 치의학 박사는 “노숙자 등을 포함해 실패를 경험한 이들에게도 패자부활전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달 31일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만난 임창준 치의학 박사는 “노숙자 등을 포함해 실패를 경험한 이들에게도 패자부활전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구,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 분의 발 끝도 못 따라 가는데요, 뭘.”

고개를 흔들며 비교를 거부했다. 지난 달 31일 서울 영등포역 인근 요셉의원에서 만난 임창준(63) 치의학 박사. 요셉의원 창립자인 고 선우경식(세례명 요셉ㆍ2008년 4월 사망) 원장의 10주기에 대한 회고를 묻자, 자조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10년 전, 이맘때네요. 선우 원장께서 선종(善終)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요셉의원에 발을 들여놨으니까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그는 주마등처럼 지나간 세월을 떠올렸다.

요셉의원은 선우 원장이 1987년 설립한 국내 1세대 무료병원이다. 선우 원장이 처음 무료 진료를 시작했던 서울 신림동에 재개발로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자, 요셉의원은 1997년 쪽방촌 주민들과 노숙자, 외국인 근로자들이 모여 있는 영등포역 근처로 둥지를 옮겼다. 개원 이후 올해 3월말 기준, 요셉의원에서 무료 진료를 받은 환자들은 총 65만4,543명에 달한다. 100% 민간 후원과 지원으로 운영 중인 이 곳에선 100여명의 전문의와 2,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일손을 보태고 있다. 선우 원장 손에서 개원된 요셉의원이 ‘영등포 슈바이처’의 산실로 불리는 이유다.

임창준 치의학 박사는 지난 달 31일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고 선우경식 원장의 생전 유품을 보면서 고인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임창준 치의학 박사는 지난 달 31일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고 선우경식 원장의 생전 유품을 보면서 고인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부친 사업 실패, 알바로 학비 마련…어려운 주변인 살펴

임 박사의 요셉의원 합류는 종교적인 공감대와 함께 학창시절 불우했던 가정형편과도 관련이 있다. 대한심미치과학회(2006~07년)와 대한구강악안임플란트학회(2008~10년) 회장 등을 역임한 임플란트와 뼈이식 분야 국내 권위자이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부유하게 지냈던 가족들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부친의 사업 실패로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내몰렸습니다. 하루 아침에 월세 쪽방으로 쫓겨났어요. 아버지는 행방불명이었습니다.” 가족들의 생활은 고스란히 어머니 손에 맡겨졌다. 어머니는 당시 미군 부대에서 생활용품을 건네 받아 시장에 내다팔면서 3명의 자녀 학비와 생계까지 책임졌다.

그는 14년 전 돌아가신 모친 생각에 끝내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고교 재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보태면서도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린 그는 결국 서울대 치과대에 입학했다. “제가 힘들게 보낸 학창시절 기억 때문에 어려운 형편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더 챙기게 되는 것 같아요.” 10년 동안 자신의 치과 병원 진료와 함께 자투리 시간에 요셉의원 봉사까지 병행해 온 것은 그의 성장 배경 때문이기도 하다.

임창준 치의학 박사가 지난 달 31일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이곳을 찾은 한 환자의 치아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창준 치의학 박사가 지난 달 31일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이곳을 찾은 한 환자의 치아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실패한 노숙자들에게도 재기의 기회는 주어져야

임 박사는 요셉의원에서 봉사를 시작한 이후, 외상 진료 외에 심리적인 치료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윗니는 거의 다 썩었고 엉망이었던 아랫니 탓에 턱도 상당히 튀어 나와 있었어요. 교정 치료가 시급했습니다. 놀라웠던 건 치아 건강 상태로만 보면 60대가 훌쩍 넘어 보였는데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3년 전 찾아왔던 젊은 노숙자의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해법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당장 의료 보험 혜택을 받기 힘든 치아 수술도 서둘러야 했지만 패배의식에 사로 잡힌 30대 젊은 노숙자의 심리적인 내상 치료도 병행해야 했다. “수소문 끝에 공익 재단의 노숙자 지원 프로그램을 찾아냈고 모자란 비용은 사비로 좀 보태면서 환자의 치아를 치료했어요. 한편으로는 시간을 두고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사느냐’고 호통도 치고 달래기도 했습니다.”

30대 젊은 노숙자가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데 임 박사의 이런 맞춤형 처방은 주효했다. 자포자기에 빠졌던 30대 젊은 노숙자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노숙자 등을 상대로 무료 진료와 영화포럼, 음악 감상, 목욕ㆍ미용 서비스까지 제공 중인 요셉의원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이런 현장 경험을 한 임 박사는 실패를 경험한 이들에게 패자부활전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상할 수 있는 소설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요셉의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진짜 필요한 건 이런 희망이 아닐까요.”

글ㆍ사진=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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