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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밤의 고속도로

입력
2017.07.0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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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고속도로를 달린다.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진 하얀 점선들이 무한 반복으로 내게 다가온다. 낮에 보였던 모든 풍경은 숨어 버리고 전조등이 가 닿는 길만 보인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의 한 중간에 와있다. 휴게소가 나오면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차를 밀어 넣는다. 앞 유리창은 벌레들의 잔해로 얼룩져 있다. 와이퍼로 닦이지 않아서 휴게소 들어올 때마다 물 티슈로 문질러야 한다. 비릿한 벌레 냄새는 다음 날 차를 볕에 말리거나 비를 맞거나 세차를 해야 완전히 없어진다.

화장실에 가면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하며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 보는 사람도 있다. 하얀 세면대에는 모기들이 가득 붙어있다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면 방향 없이 날아 오른다. 휴게소 한쪽 구석에 위치한 커피자판기를 지나칠 수 없다. 다른 커피보다 100원을 더 내고 먹는 노란색 자판기 앞에 서면 비로소 휴게소는 오아시스로 변한다. 분말 크림과 설탕이 주먹구구로 섞인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면 수액을 맞은 듯 피로가 풀리기 시작한다. 커피를 마시며 넓은 주차장을 둘러본다. 아까 내 뒤로 휴게소로 들어온 트럭은 주차 칸 하나를 숙소로 배정 받고 잠들어있다. 그 옆에 비슷한 몸집의 트럭들이 같은 모습으로 엎드려 있다. 새벽이 오면 납품 시간이나 출고 시간에 맞추기 위해 눈을 뜰 것이다.

눈을 들면 별들이 희미한 눈빛으로 휴게소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나도 언젠가 지상을 떠나 저기 하늘에 떠서, 노곤한 사람들이 머무르다 가는 공간을 내려다보겠지. 하늘 위 저 사람들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지상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말을 하며 별은 밤새 눈을 깜빡인다.

다시 고속도로 본선에 합류한다. 저 먼 뒤에서 달려오는 불빛들의 모습도 여러 가지다. 순한 사슴의 눈도 있고 먹이를 습격하는 맹수의 눈도 있다. 그 맹수의 눈이 옆 차선에서 빨리 달려올 때는 긴장을 하고 나를 잘 비껴가도록 기다린다. 중앙분리대 저편에서 스쳐가는 차들에게 파이팅을 외쳐줄 때도 있다. 피곤을 이겨내고 집으로 잘 돌아가기를, 오늘 한 일이 내일 할 일의 거름이 되기를 빌어본다.

차들이 드문드문 지나간다. 저 차 안에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을까. 혹시 내가 소설에서 읽은 주인공들이 타고 있진 않을까.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그 주인공들을 많이 닮은 현실의 주인공들이 타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 없다. 그 생각에 이르니 한밤의 고속도로가 사랑스러워진다. 내가 문학 속에서 사랑했던 인생들이 지금 내 옆을 지나치고 있다. 더러는 내게 웃음을 줬고 더러는 나를 펑펑 울게 했던 그 인생들이 내 곁에 있다. 사랑스럽고 다정한 밤이다. 문학은 책 속에 박제되어 있지 않고 여기에서 밤의 심장으로 뛰고 있다. 아까 공연장에서 한 소년과 스치듯 눈을 마주치며 불렀던 노래 한 대목을 다시 불러본다. 그 소년의 불안한 눈빛이 노래에 실려 차 안을 떠다닌다. 창문을 조금 열어 그 눈빛에 시원한 바람을 안겨 준다. 당당한 눈빛으로 살아가기를. 남에게 위로 받는 눈빛이 아니라 남을 안아주는 눈빛으로 살아가기를.

한밤의 고속도로는 빨리 벗어나야 할 길이 아니고 그 자체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행 목적지다. 길이 목적지와 안식처가 될 때 인생은 지겨움과 피곤함에서 구원을 얻는다. 먼 여정이 끝나고 주차장에 들어선다. 주차장을 관리하는 할아버지는 이 새벽에 벌써 일어나 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군대식 거수경례를 한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부대장이 이등병의 경례를 받듯이 멋지게 거수경례로 답해 준다. 이 존경과 유머의 의식을 거행할 때마다 내 일상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반짝인다. 조용히 대문을 열며 몇 시간 후 다시 만날 한낮의 길들을 생각한다. 휘어진 길처럼 입 꼬리를 당겨 미소 짓는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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