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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기부를 즐기다] <1> 나를 위한 소비, 소액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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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기부를 즐기다] <1> 나를 위한 소비, 소액기부

입력
2009.09.06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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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매거진 '럭셔리'에서 명품, 다이어트, 성형수술 등 패션 관련 기사를 쓰는 뷰티에디터 이정민(26ㆍ여)씨. 올 2월 굿네이버스를 통해 베트남 소년 응우옌 푹 컴(6)과 후원 결연을 맺었다.

"명품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솔직히 없어도 있는 척 해야 할 때가 많아요. 도대체 럭셔리라는게 뭘까, 고민도 많았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던 차에 해외아동 결연을 알게 됐어요." 지난 여름 휴가 때 베트남을 찾아 후원 아동을 만나고 온 이씨는 "하도 '우리 푹 컴이~'를 입에 달고 다녀서 친구들이 먼저 꼬마의 안부를 물어올 정도"라며 "나를 따라 소액 기부를 시작한 친구도 여러 명 있다"고 말했다.

기부, 이타적이고도 이기적인

거대담론 대신 일상의 가치를 신봉하는 20, 30대는 기부라는 사회적 행위에서도 가볍고 쿨한 태도를 보인다. 남 보기 부끄럽지 않은 거액을 자기희생적 결단으로 내놓는 것이 기부라는 관념은 기부 자체를 끊임없이 미래의 일로 유예하게 만드는 핑계가 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국내 저소득 가정과 결식 아동을 돕기 위해 월드비전과 굿네이버스에 매달 소액 기부를 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박정인(35)씨는 "다들 여유가 생기면 도와야지 하지만, 때가 되면 결혼이다, 집 장만이다 해서 끊임없이 또 다른 핑계가 생기지 않냐"고 말했다. "지금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적은 액수라도 일단 부담 없이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가장 이타적 행위에 속하는 기부를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한 소비라고 말하는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기부도 내가 좋아하는 옷을 사고 밥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분기마다 후원아동의 사진이 오는데, 조금 더 자란 듯한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오르죠. 그럴 때면 기부가 그 아이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어요."(이정민씨)

여행도 가고 싶고, 기부도 하고 싶고

20, 30대 기부자들은 스스로를 가난했던 기억 때문에 평생 안 먹고 안 쓰며 모은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 미담기사 속 주인공들과는 '종'(種)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다양한 욕망을 어느 하나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3년째 인도네시아 소년 타우픽아크바를 후원하고 있는 로엔엔터테인먼트 전략기획팀 매니저 김지혜(27ㆍ여)씨는 주말이면 뮤지컬 관람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긴다. 여행을 좋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소비 항목들 사이에 축구선수가 꿈인 후원아동을 위해 구입한 축구복과 축구공, 운동화도 들어 있다.

"사진 속 아이가 늘 맨발인 게 안타까워 신발을 사 신겨야겠다 싶었어요. 2004년 쓰나미로 부모를 잃어 정확한 나이도 모르는 아이예요." 김씨는 소년이 축구복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과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어 보낸 감사편지를 받고는 눈물이 날 만큼 감동했다. 하지만 더 많이 돕기 위해 일년간 기다려온 휴가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깟 푼돈? 기부도 훈련해야 느는 '기술'

젊은 세대의 이런 작은 선행을 적은 돈으로 윤리적 허영을 채우는 '액세서리 도네이션'이라고 폄훼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유야 어떻든 하는 편이 낫다고 입을 모은다.

"그깟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창피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단돈 1,000원이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죠." 박정인씨는 "기부도 기술이라 훈련이 필요하다"며 "1,000원이 익숙해지면 1만원을 하게 되고, 10만원, 100만원으로 점점 액수를 늘려가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훈련이 안 돼 있다면 수천억원대 부자가 된다 해도 기부는 못 할 걸요."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바쁜데 왜 점점 더 많은 20, 30대들이 먼 나라의 아이들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걸까. "저희 세대는 책과 인터넷, TV 프로그램을 통해 제3세계의 고통이나 아픔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하며 자랐어요. 기부와 선행에 앞장서는 연예인들도 굉장히 많고요." 김지혜씨는 "다양한 매체와 채널을 통해 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나에게 기부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행위"라고 말했다.

박선영 기자

■ 소액ㆍ재능 기부로 '쿨한 멋ㆍ자기 만족'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골드미스' 조인경(32)씨는 해외출장 때마다 면세점과 아울렛을 뒤져 명품 쇼핑에 나선다. 친구들은 그런 조씨를 부러워하지만, 그가 지난해부터 월 3만원씩 캄보디아의 일곱 살배기 소년을 후원하는 것은 모르고 있다. "3만원이면 결연한 꼬마와 형, 동생이 한 달 동안 굶지 않아도 된대요. 이렇게 우아하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 가슴이 뻐근했죠."

웹 디자이너 박은서(34)씨는 6월부터 국내 발달장애 아동의 의료비로 매달 2만원씩 휴대폰 결제를 하고 있다. 청담동, 서래마을 등지의 유명 맛집이나 분위기 있는 카페를 즐겨찾는 그는 한 사회복지법인의 거리홍보에 마음이 끌려 "이태원 브런치 한 끼 값"을 기꺼이 내놓게 됐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명품과 외식 소비를 줄이고 '우아한 소비'를 더 늘릴 생각은 없다고 했다. "내 욕망을 포기하고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도울 정도로 착한 사람은 못 된다"는 것이다.

소액기부, 재능기부 등 일상에서의 작은 선행을 실천하는 20, 30대가 크게 늘고 있다. 공정무역 상품 구매 등 사회 전반에 일고 있는 '착한 소비' 트렌드의 주역이기도 한 이들은 거창하고 자기 희생적인 행위로 여겨지던 기부 문화에 산뜻한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6일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에 따르면 이 단체 정기후원회원 18만5,000여명 가운데 20,30대 비율이 65.2%에 달한다. 최근 증가세가 두드러져 지난해 20, 30대 신규 후원회원 수는 전년 대비 135.5%나 늘었다.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의 경우도 7월 현재 개인기부자 수가 33만3,356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2% 증가한 가운데, 20,30대 비율이 58.7%를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기부의 주체는 40대 이상 장년층이었으나, 인터넷을 통한 소액 기부, 돈 대신 전문 능력을 기부하는 능력나눔 등 기부 방법이 다양화하면서 2030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과거의 기부가 평생 모은 재산의 사회 환원이라는 극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거대담론 대신 일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20, 30대는 일상에서 작은 선행을 실천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선행의 동기 역시 크게 달라졌다. 과거처럼 빈곤의 기억 등이 아니라, 내 삶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작은 선행을 통해 자기 만족과 기쁨을 얻는 '이기적'인 목적이 주를 이룬다.

굿네이버스의 윤보애 간사는 "2030에게 기부는 특별한 결심을 요하는 자선적 행위가 아닌 자연스럽고 즐거운 '도네테인먼트'(도네이션+엔터테인먼트)"라며 "기부가 소비사회의 쿨하고 멋스러운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강지원기자 stylo@hk.co.kr

■ 개인기부 4년새 3배 증가

6일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에 따르면 이 단체 개인 기부자 수는 2005년 11만2,814명에서 7월 현재 33만3,356명으로 3배 가량 늘었다. 기부액도 2005년 3,000여만원에서 지난해 6,800만원으로 4년 만에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최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개인 기부의 활황세를 주도한 것은 바로 20,30대다. 20,30대 기부자는 2006년 전체 기부자 수의 절반을 넘어선 이래 매년 꾸준히 늘어 7월 현재 58.7%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20대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2005년 12%에 불과했던 20대의 비중은 7월 현재 30.3%로 뛰었다. 개인 기부자 3명 중 1명 꼴로 20대라는 얘기다. 40, 50대도 기부자 수 자체는 늘었지만 비중은 같은 기간 40대가 27.3%에서 17.7%, 50대가 13.9%에서 8.5%로 줄어 대조를 보였다.

20,30대 기부자들은 기부의 동기에서도 전 세대와는 차별화한 모습을 보인다.

굿네이버스가 6월 기부전문포털 '기부 스타트(givestart.org)'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30대 응답자는 '왜 기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32.6%가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당연형' 항목을 선택했다. 굿네이버스 관계자는 "기부를 통해 보람을 느낀다는 답변이 가장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다소 의외였다"면서 "기부를 시민으로서, 세계시민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의미"라고 말했다.

반면 40~60대는 주로 '가슴이 아파서'라는 답변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 "내가 좋아하는 스타따라…"

"배우 이준기씨의 봉사에 동참하고 싶어요." 지난 6월 굿네이버스에 '이준기 팬'이라고만 밝힌 20대 여성이 100만원을 보내왔다. 그는 이씨가 2월 인도네시아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사실을 언급하며 "앞으로 계속 익명으로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이 돈은 이씨의 팬클럽 회원들이 모아 보낸 670여만원과 함께 인도네시아 오지의 어린이도서관에 기증할 도서 구입비로 쓰였다.

2030의 '도네테인먼트' 현상에는 기부나 국제구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스타들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선행이 스타와 팬들을 더 가까이 묶어주는 거멀못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드비전에도 자신을 숨기고 좋아하는 스타의 이름을 내건 기부가 끊이지 않는다. 6월에는 '그룹 소녀시대를 사랑하는 삼촌팬'이라고 밝힌 30대 남성이 700만원을 기부했고, 2월에는 배우 배용준씨의 팬이라는 여성이 털모자 100개를 보내와 독거노인 등에게 전달됐다.

팬클럽 전체가 기부와 봉사활동에 나서기도 한다. 아이돌그룹 SS501의 멤버인 김현중씨 팬클럽은 4월 한국백혈병어린이 재단에 1,000만원을 기부했고, 슈퍼주니어의 팬들은 콘서트 기간 동안 현금 72만6,520원, 라면 35박스, 헌혈증서 등을 모아 아름다운재단에 전달했다. 가수 비의 팬클럽은 어린이재단이 개최한 '실종아동 돕기 걷기 캠페인'에 참가한 뒤 170만원을 기부했다.

굿네이버스 유혜선 홍보부장은 "최근 각종 매체를 통해 스타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젊은 팬들의 선행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며 "스타의 화려함보다 좋은 생각과 행동을 공유하려는 팬클럽의 진화는 긍정적 사회 변화"라고 평가했다.

강희경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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