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대선 후 두 달여 동안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정주영(鄭周永) 후보의 검찰 소환과 정계은퇴 선언, 국민당 의원들의 탈당 등이 이어지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 후보를 신처럼 모신 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제 의원직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정 대표는 선거 다음날인 12월19일 오전 간단한 기자회견만 가진 후 곧바로 서산농장으로 내려갔다.
모든 당직자들과 일체 연락을 끊었다. 이른바 ‘서산 칩거’였다. 국민당은 김동길(金東吉) 선거대책본부위원장 주재로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향후 진로문제를 논의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올 리 만무했다.
정 대표의 서산칩거 나흘 만인 23일 경주에서 의원간담회가 열렸다. 정 대표가 소집한 일종의 단합 대회였다.
의원과 지구당 위원장 수백 명 앞에 나타난 그의 얼굴은 이외로 밝았다. 서산에 칩거하면서 당시 유행했던 말 그대로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라고 마음 먹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우리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줬다.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국민당이 뭉치는 계기가 될 것이다”는 말에 우리는 이상하게 힘이 생겼다. 뭔가 살 길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당선자가 정 대표와 국민당, 그리고 현대그룹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을 깨라”는 특명이 떨어졌다는 말도 돌았다. 다음해인 93년 1월15일 정 대표는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소환됐고,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 비자금의 대선자금 유출 혐의로 전 계열사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YS의 압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그 배짱 좋은 정 대표가 검찰 소환 다음날 곧바로 미국으로 갔을까. 물론 표면적인 이유야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 취임식 참석이었지만, 속내는 향후 거취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정 대표 때문에 DJ가 당선될 지 모른다’는 대선 때 YS의 불안감이 비로소 폭발한 때였다.
하기는 대선초반 10명 중 8명은 정 대표를 찍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자신의 표가 잠식될 걱정을 했을 법도 하다.
어쨌든 정 대표는 2월1일 귀국, “1주일 내 갖고 있는 주식을 모두 팔아 현대중공업 비자금 500여 억원을 갚겠다”고 말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검찰은 6일 정 대표를 불구속 기소했고 정 대표는 3일 후인 9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대선기간 중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는데 두 후보를 일방적으로 비방해 미안하다”는 그의 힘없는 마이크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이런 와중에 국민당은 그야말로 공중 분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김동길 최고위원은 이미 정 대표의 2선 퇴진을 요구하며 최고위원직을 내놓았고 의원들도 속속 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정 대표가 정계은퇴 선언을 한 날에는 송영진(宋榮珍) 의원, 10일에는 정태영(鄭泰榮) 이학원(李學源) 의원이 차례로 탈당했다.
내가 그 해 8월 국민당을 탈당할 때에는 김동길 김정남(金正男) 정몽준(鄭夢準) 의원 등 10여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큰 기대를 갖고 국민당에 들어왔던 만큼 의원들의 실망감 역시 컸던 것 같다. 나 역시 정치판에 뛰어든 내 자신이 ‘새장 속에 갇힌 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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