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갑질' 단죄 여론 감안, 실형 선고하는 대신 양형엔 선처
재판부, 반성문 대신 읽자 조현아 연신 눈물 보이기도
“모든 일이 제 탓이고 제가 절제도 없이 화를 표출하고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사건 당시에는 제 행동이 적절했는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지만 박창진 사무장 등도 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사랑하는 사람일 텐데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면목없고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12일 오후 서울서부지법 법정. ‘땅콩 회항’ 사건 재판부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보내온 반성문을 대신 읽자 꼿꼿한 자세로 서 있던 조 전 부사장이 녹색 수의 주머니에서 꺼낸 휴지로 연신 눈물과 콧물을 닦아냈다.
조 전 부사장은 반성문에서 “제가 여기(구치소) 오지 않았더라면 낯선 이의 손길을 고맙게 여길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30일간 제게 주어진 건 두루마리 휴지, 수저, 비누, 내의, 양말 두 켤레가 전부였는데 주위 분들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샴푸 린스 등을 빌려주고 과자도 내어주어 고마웠습니다”고 적었다.
조 전 부사장은 이날 실형 선고를 예상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되는 순간, 조 전 부사장은 한쪽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계속 눈물을 흘렸다. 대한항공 측도 집행유예 선고를 대비해 조 전 부사장이 타고 갈 차량까지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조 전 부사장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은 재판부가 최대 쟁점이었던 항공보안법 상의 항로(航路)변경 혐의에 대해 유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항공보안법은 항로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 없이 ‘승객이 탑승한 후 항공기의 모든 문이 닫힌 때부터 내리기 위하여 문을 열 때까지’를 ‘운항 중’으로 본다는 기준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 전 부사장 측은 ‘항로’는 공로(空路)를 의미하는데 검찰이 지상 활주로까지 포함해 확대 해석했고, 사건 당시 항공기 이륙 전 ‘푸시백’(push backㆍ항공기 견인차를 이용한 후진)이 17m 움직인 것에 불과해 항로 변경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항공보안법 제정 당시 참조한) 헤이그 협약, 몬트리올 협약은 보호대상인 항공기의 범위를 ‘운항 중’으로 확대했고 우리 항공보안법은 이에 따른 것”이라며 “(항공기 문이 닫힌 후) 조 전 부사장이 램프 지역에서 지상이동 중인 항공기를 게이트로 되돌아 가게 한 행위는 항로변경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항로변경죄를 인정하면서도 법정 최저형을 선고했다. 이 법은 위계 또는 위력으로서 운항 중인 항공기의 항로를 변경하게 하여 정상 운항을 방해한 사람은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형 선고를 하는 대신 양형에 있어서는 선처를 한 것으로 풀이된다.
재판부가 실형 선고를 고수한 것은 재벌 2,3세의 ‘갑질’을 단죄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강경한 여론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재판장인 오성우 부장판사는 이날 선고 공판에서 이번 사건을 “돈과 지위로 인간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간의 자존감을 무릎 꿇린 사건”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감이 있었다면, 직원을 노예쯤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승객을 비롯한 타인에 대한 공공의식만 있었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라고 조 전 부사장을 질타했다.
오 부장판사는 공판 과정에서 사건과 관련 없는 조 전 부사장의 부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을 이례적으로 증인으로 불러 사무장과 승무원의 권리 보장을 다짐받는 등 약자를 보호하는 세심함을 보여줬다. 사법연수원 22기인 오 부장판사는 사상 최장기간 철도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김명환 전 위원장 등 전국철도노조 간부들에게도 업무방해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작년 12월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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