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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공식은 없다… 내 작품들 다들 망한다고 했으니까

입력
2015.08.1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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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못 될거라 생각

호기심·의지가 재능보다 중요

오기로 찍은 범죄의 재구성

300만원으로 1년반 지내며

시나리오 썼지만 캐스팅도 안돼

연출료 받고 목숨바쳐 찍겠다 다짐

할리우드는 제안오면 갈 것

크리스틴 스튜어트·존 쿠삭 무조건

영화 ‘암살’의 최동훈 감독이 10일 오후 서울 이화동의 영화사 케이퍼필름 사무실에서 최동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영화 ‘암살’의 최동훈 감독이 10일 오후 서울 이화동의 영화사 케이퍼필름 사무실에서 최동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14년 전쯤 한 카페에서 젊은 남녀가 처음 만났다. 남자는 감독 지망생. 여자는 영화사 싸이더스의 직원이었다. 용무는 시나리오 계약. 여자의 상사는 1,000만~1,500만원 사이에 알아서 계약을 성사시키라고 지시했고, 여자는 당연하게도 1,000만원부터 흥정을 시작했다. 1,000만이라는 금액에 남자는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고 “합리적인 가격”이라며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1,000만원이면 2년도 생활할 수 있는 거금”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남자는 이후 감독으로 데뷔했고 지금 ‘암살’로 1,000만 관객 동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암살’의 극장 매출액만 해도 10일 현재 711억 7,154만원(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이다.

남자는 최동훈 감독. ‘범죄의 재구성’(2004)으로 데뷔한 뒤 ‘타짜’(2006), ‘전우치’(2009)를 연출하며 흥행 신화를 이어온 충무로의 흥행술사다. 그는 ‘도둑들’(2012)로 1,000만 관객 클럽에 첫 가입한 데 이어 두 번째 1,000만 영화를 이력에 올리게 됐다. 한국에서 1,000만 영화를 두 편 만든 이는 윤제균 감독(‘해운대’와 ‘국제시장’)이 유일하다. 최 감독을 10일 오후 서울 이화동 케이퍼필름 사무실에서 만났다. ‘암살’의 제작사인 케이퍼필름의 안수현 대표는 최 감독의 아내로 앞의 그 ‘여자’이기도 하다.

-1000만 관객 돌파가 카운트다운 중인데 기분이 어떤가?

“고맙기도 하고 부담감도 생기겠구나 한다. 내 뇌를 속여서 ‘이런 적이 없어 나는’하고 빨리 잊어버리려 한다. 나는 촬영장에서 어떤 장면을 다시 찍을 때 ‘우리는 한 번도 안 찍은 거다. 마치 처음 찍은 것처럼 뇌를 속이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처음 찍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빨리 잊고 다시 평범한 감독으로 돌아가서 다음 영화를 고민하고 싶다.”

-뇌를 속이기 위한 행동으로 무엇이 있을까?

“‘암살’에 대해 이젠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한다. 한동안은 영화는 좀 멀리하고 책이나 음악을 가까이 하려 한다. 소설책은 예전에는 정말 많이 봤다. 시나리오 첫 줄을 쓰기 시작해 기자시사회 하는 날까지 2년 반이 보통 걸린다. 책도 못 읽고, 영화도 못 본다. 그러면 ‘슬슬 밑천이 떨어져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소설책 한 50권만 어디로 가져가서 조용히 읽고만 싶다.”

-독서광으로 소문났다. 속독을 하는 편인가?

“빨리 읽는다. 소설책 한 권을 4시간이면 다 읽는다. 날을 새서 아침까지 책을 읽은 뒤 자는 경우가 많다. 잡은 책을 끝까지 다 안 읽으면 잠을 못 잔다. 어렸을 때부터 버릇이다. 그래서 학창시절에 부모님한테 많이 맞았다. 다음날 학교 가야 되는데 책 읽느라 날을 샜으니까… 고등학생 때 수학책 밑에 소설책 놓고 읽고 그랬다.”

-고전소설을 좋아했나 아니면 무협지 같은 책?

“무협지는 잘 안 읽었다. 중ㆍ고등학생 시절에는 1970년대 작가들인 김주영, 이문열, 이청준씨의 소설을 읽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대학가서는 30년대 소설을 주로 읽었다. (서강대)국문과 학생였으니까 ‘숙영낭자전’ 이런 것도 읽었다. 무얼 하겠다는 생각도 그리 강하지 않았고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취업 부담이 크지 않았다. 막연하게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시험이 어려워 아예 엄두도 내지 않았다.”

-졸업을 하면 무얼 해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한 시기는 언제인가?

“대학 4학년 때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속했던 대학 동아리가 세미나만 하는 ‘주둥이 동아리’였는데 한 선배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기로 입학했다. 그 선배가 실습 작품을 찍는다고 나를 불렀다. 복사와 조명 등을 도와줬다. 당시 촬영은 조의석(‘감시자들’) 감독, 조명은 정재은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스크립터는 이언희(‘ing’) 감독이 각각 담당했다. 나는 완전 초보였다. 선 정리하고 조명 들고 있으면서 ‘나도 영화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소설을 좋아했으니 작가에 대한 꿈도 있었을텐데…

“내가 언어의 조탁미가 떨어진다. 단편소설을 써 본적도 있는데 이거는 뭐… 소설을 쓸 정도로 엉덩이가 무겁진 않았다. 영화는 나처럼 활동적인 인간이 하기에 더 적합한 것 같았다. 그래도 영화감독은 못 될 거라고 생각했다. 감독은 위대한 인간이 하는 걸로 여겼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열심히 노력해서 시나리오작가까지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화아카데미 들어가서도 그런 생각이었나?

“임상수 감독의 ‘눈물’ 연출부 들어가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장편영화 감독이 일하는 걸 처음 봤다. 단편영화를 찍을 때는 영화아카데미 동기에게 ‘카메라 트랙인(카메라가 움직이면서 촬영대상에 접근하는 촬영법) 좀 해줘’라고 하고 동기가 ‘왜 트랙인 하는데?’ 물으면 ‘놀면 뭐해 그냥 들어가’ 이렇게 말하는 수준이었다. 임 감독 밑에서 많이 배웠다. ‘감독은 엄청난 노동을 해야 하는구나. 전체를 다 관장하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알았다.”

-왜 감독은 위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영화를 만든다는 건 피라미드를 만드는 거랑 비슷하다가 생각했다. 유기체들을 어떻게 종합해서 한 편으로 딱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내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편영화로도 시나리오도 상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재능이 없어도 일단 하면 돼’ 라는 생각은 있었다. 재능보다 더 중요한 건 호기심과 의지이니까. 나는 호기심이 강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걸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감독 데뷔 전까지 금전적 압박은 없었나?

“33세 때까지 돈을 못 벌고 살았다. 최저생활비로 살았는데 술 사주는 사람도 많고 해서 잘 버티었다. 과외도 하고, 학원 선생도 하고, 막노동도 많이 했다. 막노동이 아르바이트 중에는 최고다. 성격유형검사(MBTI)를 하면 난 벌목공이 적성에 맞다고 나온다(웃음).”

-목동에서 학원 강사 했을 때 인기 강사였다는 말도 있다.

“전임으로 일하지 않고 파트타임으로 강의를 했다. 그런데 한 학원장이 ‘너 전임을 해 볼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싫은데요, 저 영화 아카데미 시험 봐야 해서’라며 거부했다. 그런데 불합격하면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돈을 벌어서 살아야 되니까. ‘눈물’ 연출부에 들어가 1년 동안 받은 돈이 130만원 정도였다.”

-재능을 확인했을 때가 언제였나?

“그런 걸 발견한 적이 없다. 어느 날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가 ‘넌 말을 잘하니까, 네 시나리오를 한번 써봐라.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 라고 물었다. ‘300만원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버티면서 ‘범죄의 재구성’ 시나리오를 썼다.”

-재능을 발견 못했다니 수긍하기 어렵다. 데뷔작부터 호평을 받고 흥행도 성공했다.

“‘범죄의 재구성'은 무조건 흥행 실패할거라고 다들 그랬다. 차 대표님도 ‘이건 50만을 넘기기 힘든 영화’라고 했다. 그런데 하도 캐스팅이 안 되니까 ‘오기로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데뷔도 좋았지만 연출료를 받아 더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뭉칫돈을 벌었다. ‘범죄의 재구성’ 연출료가 3,000만원이었다. 그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래서 ‘목숨 바쳐 영화를 찍어야지, 3,000만원을 주셨으니까’라는 생각을 했다.”

-‘범죄의 재구성’이 예상 밖으로 흥행해서 보너스도 받았나?

“자동차 한 대 값을 받았다. 차 대표가 코란도로 한 대 사주겠다 했다. 나는 폭스바겐을 사고 싶다고 했다. 결국 150만원 주고 중고 아반떼를 샀다. 잘 타고 다니다가 ‘타짜’ 촬영 때 액션 장면 찍으며 부쉈다. 촬영용 폐차 사올 돈으로는 연출부원들 신발 한 켤레씩 사주었다. 열심히 뛰라는 의미였다. ‘땀나게 뛰려면 신발 값도 필요하다’는 ‘암살’의 속사포(조진웅) 대사가 여기서 나왔다.”

-두 번째 작품 ‘타짜’도 흥행 성공을 했다. 그런데도 재능이 없나?

“‘타짜’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3개월 동안 만화책도 안 보고 생각만했다. 전주의 어느 콩나물국밥 집 이층에 촬영 세트를 만들고 영화를 촬영하다 일층에서 점심을 먹을 때 손님들이 서로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야 여기서 ‘타짜’ 찍는다는데 분명 망할거야. 감독이 ‘범죄의 재구성’ 만든 신인인데 오만이 극치에 달해 ‘타짜’를 찍는다더라’라는 내용이었다.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선 ‘망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했고 그래서 더 열심히 촬영을 하게 됐다.”

-‘타짜’ 다음 작품이 원래는 ‘암살’이었다고 하는데…

“‘타짜’ 끝나고 ‘3명의 독립군이 친일파 하나랑 일본 최고 장교를 죽이러 온다’는 이야기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독립군 중 한 명은 여자인데 이걸 미스터리로 갈까, 서스펜스로 갈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시나리오가 안 써졌다. 그래서 ‘전우치’를 선택했다. 8개월 반 동안 컴퓨터 그래픽이며 액션이며 헤매면서 찍었다. 개봉한 뒤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18세 영화 찍다가 8세 영화 찍었다고. 개봉을 또 ‘아바타’랑 같이 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타짜’ 등에 반했던 영화팬들은 왜 엉뚱하게 ‘전우치’냐는 반응을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결혼 전에는 착한 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밤에 보니까 몰래 담배를 피는 느낌이었을 수도 있다. ‘전우치’가 내겐 도움이 많이 됐다. 영화 촬영의 혹독함을 겪기도 했고 사건사고도 많았다. ‘부적 대백과사전’을 보고 베낀 부적을 휙휙 뿌리며 촬영한 영화인데도 그랬다. 그런데 ‘도둑들’이 초청을 받아 스페인 시체스판타스틱영화제에 갔을 때 다들 ‘전우치’ DVD 들고 와서 싸인을 부탁했다. 내 안에 남들이 안 한걸 하고 싶은 아주 강한 욕망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삼국유사를 너무 좋아한 것도 문제다.”

-‘도둑들’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전우치’ 개봉 뒤 홍콩영화제 갔다가 ‘아 세상에 이따위로 생긴 도시가 있구나’ 라며 너무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영화를 찍어야지’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도둑들’을 시작하게 됐다. 홍콩 마카오 촬영이 힘들긴 했지만 노는 느낌으로 만든 영화였다. 제작비는 110억원쯤 들었는데 손익분기점만 좀 넘기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1,000만 관객까지 넘길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울 수 있는 지점이 없고, 한국 사람의 무의식을 건들만한 요소도 없었다. 단순하게 재미있게 찍자고 생각했다. ‘전우치’ 때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그랬다. 관객이 1000만을 넘었을 때 놀랬다. 그래서 생각했다. ‘충무로를 망령처럼 떠도는 흥행 공식이 있지도 않은 것이구나.’ 할리우드 고전영화 ‘선셋대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가 잘 안 팔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너무 보편적이거나 너무 독특해서.’ 보편적이면서 독특하면 팔린다는 얘기다. ‘도둑들’을 찍으면서 그런 걸 느꼈다.”

-‘암살’ 연출에도 어떤 흥행 공식도 없다는 자신감이 작용했나?

“아니다. 모두가 대놓고 ‘이건 안 된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일제강점기를 아예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들 했다. 그래서 망할 거면 멋지게 망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저기 압록강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레지스탕스가 돼서 경성에 침투한 뒤 무슨 일을 벌일지 관심이 컸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쓰는데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할리우드에서 연출 제안이 들어왔다. 영국 작가를 붙여 준다기에 영국 런던으로 안수현 대표와 함께 갔다. 시나리오 회의를 계속 하는데 ‘은행 털기’ 내용이라 재미가 없었다. 4일 정도 스코틀랜드 여행을 갔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자기들은 잉글랜드에 패배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더라. 그래서 우리도 일본에 진짜 패배한 것인가 생각을 했다. 김구나 김원봉 같은 사람은 25년 동안 한 번도 안 잡히고 끝까지 싸웠으니까. 런던에 돌아와서 ‘못 하겠다’고 말한 뒤 한국에 와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예산이 얼마 될지 묻는데 안수현 대표가 말을 안 했다. 그리고 어느 날 180억원이라고 말했다. 오 마이 갓…”

-우리가 패배한 게 아니라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내가 본 독립투쟁의 역사는 프랑스랑 비슷하다. 나라를 뺏기고 엄청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했다. 만주에 학교도 세우고, 군관학교도 만들고 임시정부도 만들었다. 1900년부터 이주노동이 시작됐다. 증기선을 타고 멕시코나 캘리포니아 쿠바 하와이에 가서 파인애플을 따고 알로에를 땄다. 그들은 대한제국 여권을 가지고 갔는데 1910년에 여권 효력이 사라졌다. 일본 영사관에서 다시 등록을 하라해도 불법체류자 신분을 각오하며 일본인으로 등록하지 않았다.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니 노동 환경은 더 참혹해졌다. 그 와중에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 이주노동자들의 자녀들이 태평양전쟁 때 미군으로 입대를 했다. 정말 멋지지 않나. 그제서야 미국 정부가 영주권을 주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패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싸운 것이다.”

-‘암살’의 주인공을 전지현으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어떻게 보면 안옥윤(전지현)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염석진(이정재)에 대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옛날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라는 책에서 유명한 살인자 두 명에 대한 르포를 쓸 때 ‘그 살인자와 나는 같은 집에 살았던 인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앞문으로 나왔고 그는 뒷문으로 나왔을 뿐이다’라고 했다. 염석진과 안옥윤의 이야기는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사람과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같은 집에서 나온 뒤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을 살게 된다. 둘의 성장사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제작 막바지에 누구 이름을 크레딧 제일 앞에 올릴까 고민했다. ‘독립군이고 멋있는 사람이니까 전지현이 올라야 한다’고 내가 말했다.”

-배우 중에선 김윤석과 가장 많이 작업을 했다.

“윤석 선배와는 네 작품을 했다. 그는 언제나 나의 캐스팅 최우선 순위다. 애송이 시절부터 ‘우리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하며 지내온 사이다. ‘암살’도 윤석 선배랑 하고 싶었는데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함께 하지 못하게 됐다. ‘도둑들’ 시나리오 쓸 때 내가 치질수술을 받아 한 달 동안 누워있었다. 윤석 선배랑 맥주를 마시고 들어온 안 대표가 ‘윤석 선배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고 했다. 영화가 상하이에서 끝나는 내용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상하이를 부산으로 바꾸니 재미가 있어지더라. 윤석 선배랑 얘기하면 영감이 막 온다.”

-‘암살’을 사회적 정치적 해석하는 시선은 어찌 보나?

“‘친일파 다 잡아 죽입시다’라는 선언적 메시지를 전하기보다 ‘이 영화 안에는 이런 캐릭터가 있고,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끝났습니다’만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한 감정을 일방적으로 느껴보세요 하긴 싫었다.

-할리우드는 이제 갈 생각 없나?

“괜찮은 제안이 있으면 가려고 한다. 그런데 할리우드는 작가나 프로듀서가 더 힘이 센 곳이다. 감독은 고용돼서 영화를 찍는 사람이다. 좋은 시나리오들이 나에게 오지 않을 거다. 아시아 감독들은 할리우드에서 200억원 정도의 저예산영화를 찍는다. 시나리오에 만족을 못한다면 써야하는데… 영어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보며 머리 속에서 종이 딱 울렸다. ‘한국영화의 선구자적 길을 갔구나’라고 생각했다.”

-가장 일하고 싶은 할리우드 배우는 누구인가?

“크리스틴 스튜어트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보는데 정말 좋은 배우더라. 냉담한 연기가 좋았다. 윤석 선배는 폭발하는 연기를 보여주지 않고도 분노를 전달해서 좋아한다. 줄리안 무어같은 여배우도 좋아한다. 남자배우라면 무조건 존 쿠삭을 캐스팅하겠다.”

-김원봉 역할에 왜 조승우를 캐스팅했는가?

“김원봉은 영화에 쓸 만한 에피소드가 많은 인물이라 꼭 등장시키고 싶었다. 조승우가 생각나서 ‘타짜’이후 9년 만에 전화를 했다. ‘특별출연을 부탁하고 싶은데 시나리오 읽고 재미없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다. 3일 뒤 답이 왔다. ‘시나리오 재미있어서 해. 나 바쁜데 할게.’ 사람들이 조승우를 통해 김원봉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김원봉은 잘생기고 멋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마어마한 배우가 해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장윤정 인턴기자(경희대 언론정보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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