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
주필

등록 : 2016.11.03 20:00
수정 : 2016.11.04 01:23

[황영식의 세상만사] 하야ㆍ탄핵도 아니면

등록 : 2016.11.03 20:00
수정 : 2016.11.04 01:23

말뜻까지 바꾼 최순실 ‘국정농단’

대통령의 위법이 부른 분노ㆍ허탈

‘책임총리’ 유력 대안마저 사라지나

10월 29일 오후 서울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박 대통령 하야 .탄핵을 촉구 하는 대규모 촛불집회에서 500영 사회 시민단체와 1만여명을 시민이 모여 대규모 촛불 집회를 열고 있다.이들은 청계광장 집회를 끝낸후 종로 1가를 지나 광화문 광장에 집결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막는 경찰과 대치 하고 농성을벌였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okillbo.com

나라가 통째로 ‘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려 있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박근혜 대통령과 최씨의 관계를 둘러싼 온갖 증언과 소문이 나라를 휩쓸었다.

그 대부분은 언론 보도와 검찰 수사 등을 통해 하나하나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국민의 실망과 분노, 허탈이 그만큼 크다.

단적인 예가 국민의 언어감각까지 바꾼 ‘국정농단’이란 말이다. 최씨의 불법적 국정개입에도 불구하고, ‘독점(獨占)ㆍ독차지’의 뜻인 ‘농단(壟斷)’에 이른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한자에 밝지 못한 누군가가 이를 ‘갖고 놀다, 희롱하다, 주무르다’의 뜻으로 오해해 ‘국정 희롱(戱弄)ㆍ우롱(愚弄)’ 정도의 어감으로 ‘국정농단’을 잘못 쓴 것이 삽시간에 퍼졌다. 어처구니없지만, 최순실 게이트의 심각성에 비하면 별게 아니다.

이제 국민은 더 이상 박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여기지 않는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 스스로가 위법으로 법치의 근간을 흔들고 헌정질서를 깨뜨렸다는 거창한 이유는 불필요하다.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교수와 학생 등 대학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중학생까지 나서서 하야(下野)를 외치고 있다. 역대 대통령 어느 누구도 조용하게 임기를 마친 바 없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완전히 국민 눈 밖에 나기로는 박 대통령이 처음이다.

권력의 기반인 권위와 신뢰를 잃고, 정신적 버팀목인 최씨와 수족 같았다던 ‘문고리 3인방’과도 차단된 박 대통령이 어찌 국정을 이끌까. 그런데도 임기는 아직 15개월이나 남았다. 장기화 조짐이 뚜렷한 국정 공백을 언제까지 국민이 견뎌야 할까. 국정은 하루라도 멈춰 서서는 안 되고, 나라 안팎으로 위기가 밀려드는 지금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분노와 허탈을 넘어 나라 걱정을 덜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권과 지식층이 일찌감치 거론하기 시작한 거국중립내각, 또는 책임총리가 바로 그것이다.

둘은 별개가 아니다. 거국중립내각은 어감상 국가적 위기의 극복이나 구국(救國)과 이어진 듯해서 호감을 자아내지만, 대통령중심제와는 친연성이 떨어진다. 헌법 제86조는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1항),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2항)고 규정했다. 이어 헌법 87조는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1항)과 해임 건의권(2항)을 규정했다. 국무총리 임명과 국무총리의 제청에 따른 국무위원 임명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거국중립내각의 ‘거국성’과 ‘중립성’은 결국 국회에서의 여야가 이루는 공감대, 즉 정치적 의미에서나 찾아야 한다. 그런 정치적 합의는 국정공백의 타개책으로 거론되고 있는 현재의 ‘책임총리제’에도 불가결하다. 두 제도는 효율적 작동을 위한 전제 조건도 같다. 우선은 총리와 내각에 실질적 국정 권한 대부분을 넘기겠다는 대통령의 명시적 선언이 있어야 하고, 총리나 각료 후보자 인선에는 여야 모두의 교감을 얻어야 한다.

‘노무현 사람’인 김병준 총리후보자는 얼마든지 책임총리의 적임자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국중립내각이나 책임총리 요구의 두 핵심 절차, 즉 공개 선언과 국회와의 교감을 빠뜨렸다. 야당은 일제히 박 대통령의 일방적 인선에 반발,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 절차에 응할 수 없다는 자세를 굳혀 가고 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의 극적 태도 변화가 없는 한 김 후보자의 총리 취임은 불가능하다. 자칫 책임총리 구상 자체가 물건너갈 수 있다는 우려가 무성해진 이유다.

그 경우 대안은 탄핵이나 하야뿐이다. 국회 재적의원 3분 의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탄핵은 현실성이 없다. 더욱이 노 전 대통령 당시의 ‘탄핵 역풍’을 누린 야당은 탄핵의 ‘ㅌ’자도 꺼내지 않는다. 또 국민의 하야 요구는 잇따라도 야당은 한사코 공식 요구는 피한다. 너무 답답한 상황이어서 박 대통령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국민 선물을 기대하게 된다.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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