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절할 것 같으면 바로 제 팔을 두드리시면 됩니다.”
대련 자세를 취하자 마자 갑작스럽게 들어온 ‘초크(Chokeㆍ목조르기)’ 기술에 기자는 링에 오른 지 5초도 안돼서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유사시에 써먹을 법한 간단한 호신술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가 낭패를 당한 것. 과연 그가 사는 세상은 독했다. 16일 한국의 유일무이한 여성 종합격투기 UFC 파이터 함서희(28ㆍ팀매드)를 만나, 파이터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들어봤다.
함서희는 지난달 28일 국내에서 처음 열린 ‘UFC 파이트 나이트 서울’에서 한국 파이터로서는 가장 먼저 승전고를 울린 주인공이다.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UFC 파이터로서 어쩌면 남성 파이터들보다 더 큰 몫을 해낸 셈이다. 키가 13cm나 더 큰 상대 코트니 케이시(28ㆍ미국)를 상대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둔 함서희는 그동안 집에서 병원만 오가는 생활을 했다. 상대에게 얻어맞아 찢기고 부어 올랐던 얼굴이 이제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파이터로 살아남기‘험난한 정글’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의 머리 속에 ‘파이터’라는 단어는 없었다. 함서희는 “어머니가 여군이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셔서, 고교 2학년 때부터 태권도와 킥복싱을 시작했다. 그 전에는 피아니스트를 꿈꿨었고, 드라마 단역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에게 ‘무도의 길’은 단순히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세계적인 여성 UFC 파이터 론다 로우지(28ㆍ미국)가 엘리트 유도 선수였던 것과 비교하면, 함서희는 ‘우연’에 이끌려 파이터가 된 셈이다.
우연은 그 길로 운명이 됐다. 고교 2학년때 시험 삼아 출전한 국내 킥복싱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고, 2007년 일본에서 종합격투기 선수로 정식 데뷔를 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그를 파이터로 인정하지 않았다. 함서희는 “모두들 제가 나이가 어려서 잠깐 한눈을 파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라고 되돌아봤다. 하지만 파이터로서의 꿈이 구체화될수록 ‘여자가 쌈박질만 하고 다녀서 어쩌냐’, ‘밥벌이도 못할 것이다’라는 잔소리가 늘어났다. 게다가 복싱, 레슬링처럼 올림픽 정식 종목도 아닌 격투기라니. 감당해야 할 편견과 선입견은 더욱 크고 무거웠다. 그렇게 싸워온 세월이 벌써 11년이다.
하지만 함서희는 담담한 어조로 “저에게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보다 지금의 제가 더 살만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종합격투기도 엄연히 규칙과 심판이 있는 스포츠다. 여태까지 한 우물만 팠고, 이제는 이 바닥에서 인정 받는 사람이 됐다”라고 강조했다. 이어“부모님도 저를 자랑스러워하시고 어딜 가나 ‘내 딸이 함서희다’라고 말하신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 역시도 배고픈 시절을 견뎌야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모님에게 용돈을 달라며 손을 벌리기도 했다. 그만큼 여성 파이터로서 설 자리가 없었고, 미래 또한 불투명했다. 함서희는 “일본 격투기 무대에서 챔피언이 되고, UFC에 데뷔하기 전까지 운동에만 매달리는 한 없이 작은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한국인 여성 파이터로서는 최초로 미국 최대 격투기단체인 UFC와 전격 계약했다. UFC는 전세계 파이터들에게는 꼭 한번 밟고 싶은 꿈의 무대다. 이제는 그도 누군가의 ‘롤모델’이 된 것. 함서희는 “이때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옥타곤(8각형의 경기장) 밖의 함서희는 여느 청춘들처럼 평범하다. 동료이자 연인인 파이터 김창현(31ㆍ팀매드)과 여느 커플들처럼 알콩달콩 연애도 하며, SNS 역시 앙증맞은 글귀와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도 함서희의 세상은 여전히 독하다. 그는 “다음달이면 나이 앞자리가 ‘3’이 된다. 힘들어도 더 힘을 내야 한다”며 이를 악물었다.
부산=이현주기자 memory@hankookilbo.com
●함서희는 누구
한국의 종합격투기 파이터. 전적은 16승6패. 2007년 일본 종합격투기 대회‘딥’에서 라이트급 챔피언 와타나베 히사에를 꺾고 화려하게 데뷔했다. 2013년 역시 일본 종합격투기 무대인 ‘쥬얼스’에서 페더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2014년 11월에는 통합 여성 종합격투기?세계랭킹 아톰급(48kg) 2위에 이름을 올렸고, 곧바로 한국인 여성 파이터 최초로 미국 최대 종합격투기 단체 UFC와 계약해 화제가 됐다. UFC에서는 UFC 최저 체급이자 본인 체급보다 한 단계 위인 스트로급 (52kg)에서 활동한다. 지난달 28일 한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UFC 대회 ‘UFC 파이트 나이트 서울’에서 미국의 코트니 케이시를 판정으로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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