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배액 한도, 실손해의 3배 이내
부도덕 상혼에 경고조차 안돼
징벌적 손배 청구 소송 1건 그쳐
“불법 순익 박탈 관점서 산정 필요
징벌제→기업 탈바꿈 선순환으로”
2011년 대기업이 중소기업 기술을 가로채면 손해의 최대 3배를 물리는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이 생겼다. 국내 1호 징벌적 손해배상제다. 재계의 반발에 당시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기술을 탈취 안 하면 될 게 아니냐”고 응수했다. 2년 뒤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부당한 물품인수 거부 등에도 확대 적용됐다. 만성적 갑질을 저지해 경제민주화를 시도하고, 중소기업을 살리는 경제활성화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후 징벌적 손배로 대기업이 타격을 받은 사례는 아직 없다. 갑질 횡포가 씻은 듯 근절됐다고도 볼 수 없다. 징벌적 손배를 도입만 한다고 가습기 살균제 사태처럼 사람 목숨을 헐값으로 여기는 일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기업의 악의적 불법행위의 성격에 따라 손배액 한도를 대폭 상향해야 실효성이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
기껏 3배 이내... 악덕기업 ‘장래비용’ 산정 우려
우리나라에도 징벌적 손배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같은 제조물에 대해선 도입되지 않았지만, 하도급법,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개인정보보호법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25일 시행), 대리점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연말 시행) 등에 징벌적 손배제가 도입됐다. 이 법들은 모두 손배액 한도를 실손해의 3배 이내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징벌적 손배가 청구된 소송은 단 1건뿐이다. CJ대한통운의 부당위탁 취소 등으로 피해를 입은 수급사업자가 지난해 창원지법에 55억여원을 청구한 건이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김차동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3배까지인데다 법원 등이 감액할 여지를 둬서 실효성이 떨어지는 게 현행 징벌적 손배제의 흠”이라고 지적했다. 하청업체가 거래관계 파탄과 업계 퇴출을 감수하고 법정 다툼을 벌이기에는 배상 한도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기업이 3배 손배라는 장래의 손해비용을 미리 계산해두고 불법수익을 올릴 여지가 크다는 주장도 있다.
실손해 기준에 얽매일 게 아니라 부당이익에 따라 손해액을 산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소비자법학회장인 서희석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해자의 실손해 기준이 아니라 가해기업이 불법행위로 얻은 이익을 박탈하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말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독일은 징벌적 손배제가 시행되고 있지 않은 대신 소비자단체가 기업의 부당이익 환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이를 한국형 징벌손배제로 응용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미식법을 따온 국내 특허법과 저작권법도 부당 이익을 손해로 추정하는 개념이 있다.
배심원이 배상액 정하게
손배 한도가 올라도 법정에서 제대로 징벌적 손배액이 나와야 법 취지를 살릴 수 있다. 판사들은 이를 위해 민사소송 배심제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징벌적 배상액 산정 기준이 명확지 않다면 논란에 휘말릴 것을 우려한 판사들이 보수적으로 손배액을 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재경법원의 한 판사는 “실제 피해액을 토대로 배상액을 정하고 위자료 실무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틀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고액의 징벌 배상 판결을 하기는 사실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판사와 대중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공정성 시비를 줄이기 위해 배심원단의 수렴된 의견을 고려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른 판사도 “관련 판례가 쌓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국민의 지지를 얻은 정책이 현실에 확실히 반영되도록 하려면 배심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심원은 직업 법관이 빠지기 쉬운 타성으로부터 자유로워 가해행위의 악성 여부를 사실관계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법학 전공 교수들의 시각이다.
다만 운영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곤란하다는 의견이 있다. 고등법원 한 부장판사는 “판사는 피해자가 받은 고통, 가해자의 악성, 장래 동일 범죄의 재발가능성, 사회적 비난 가능성을 참작해 결정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 성격의 법 조항을 신설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점인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악의, 반복된 범행 등 징벌 요건에 해당하는 사건에 한해 배심제를 적용한다면 비용 부담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에선 법원이 손해배상 구간을 설정해 배심원이 적절한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1990년 이후 법원에 과다한 배상액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다.
“높은 배상 경고, 기업에도 득”
징벌적 손배제가 시행되고 있는 미국에서는 여러 모로 위험을 억제하고 소비자 권익을 향상되는 효과가 확인된다. 이미 1975년에 보험업계 세미나에서 “피해 사실은 철저히 조사하고 가능한 빨리 손실 비용을 지급하라”는 발표가 있을 정도로 징벌적 손배제를 피하려는 조치가 이뤄졌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당시 보험사들이 일부러 보험금지급을 지연해 피보험자들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서 징벌적 손배를 자주 당했다”고 설명했다. 맥도날드 커피를 쏟아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1992년 징벌적 손배 판결을 받은 뒤 전 세계 커피업체가 커피 홀더에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문구를 명시한 것도 단적인 예다. 맥도날드는 700여명이 화상을 당하는 사고를 외면했다가 대가를 치렀고, 이를 목격한 다른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나섰다.
반면 한국에서는 아직 기업들이 제품의 위험을 인지하고도 이를 공개하거나 리콜하는 일이 드물다. LG전자가 2004년 밥솥 폭발사고 당시 전사적으로 리콜 동원령을 내린 사례 등이 있지만 최근 정수기업체 코웨이가 중금속 니켈 성분이 검출된 사실을 숨기고 무상 업그레이드를 명분으로 수습한 사례 등이 일반적이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징벌 배상이 도입되면 소비자가 다칠지 모를 위험이 보고됐을 때, 수리비나 이미지 손상을 걱정하는 대신 재빨리 리콜하는 기업의 의사결정이 나올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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