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8월의 방송출연 정지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20여년 만에 겨우 산 정상에 오르니까 5, 6개월 만에 다시 하산하라는 격이었다.나는 분통이 터져 할복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저질 판정을 받은 자식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TV 출연한 아들 사진을 단칸방 사방 벽에 붙여놓고 동네 파출소 주임과 공무원들에게 자랑하던 어머니 생각에 눈 앞이 깜깜했다.
나는 미친 듯이 탄원서를 보냈다. 청와대에도 보안사에도, 그리고 방송사와 사회정화위원회에도 탄원서를 보냈다.
무엇보다 자식들 보기가 민망했다. 공개적으로 저질 판정을 받은 아버지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밖에 나가기조차 꺼렸다.
아이들은 학교 친구들이 수군거리며 비웃는다고 학교에 가지않겠다고 버텼다.
나는 결심했다. “좋다. 내가 정말 이 사회에서 추방돼야 할 저질인지 공개적으로 심판을 받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 해 10월 대한극장에서 생애 처음으로 리사이틀을 갖기로 한 것이었다.
‘내 코미디가 저질인지 아닌지 보고 판단하라’는 심정이었다.
당시 내 매니저이자 삼호프로덕션 회장이었던 최봉호(崔奉鎬)씨는 “지금은 여론이 좋지 않다. 이럴 때 쇼를 죽 쓰면 넌 그대로 침몰한다”며 만류했지만 나는 감행했다.
그리고 공연 당일, 나는 아침 일찍 대한극장 건너편의 다방에 앉아 극장 쪽을 주시했다. 공연은 낮1시부터였지만 오전10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오에는 대한극장에서 시작된 줄이 명동입구까지 늘어섰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면서 뜻 모를 눈물을 흘렸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아내와 아이들까지 공연장에 오라고 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입장 전 동반한 자기 아이에게 “뭘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냐? 요즘 저질이라고 텔레비전에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라던 중년의 아주머니는 야단스레 박수까지 쳐가며 깔깔거렸다.
그리고 이날 공연 수익금 1,700만원 전부를 보란 듯이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 놓았다.
평소 불우 청소년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당시 솔직한 내 심정은 “그래 한번 봐라”라는 오기가 더 컸다.
실컷 웃고 나서 ‘저질이다’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이 일을 계기로 방송사는 다시 나에게 손짓을 했다.
그 해 연말 대대적인 불우이웃돕기 모금 생방송을 벌이던 KBS가 나를 슬그머니 부르더니 명동에서 잠깐만 모금 운동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길거리에서 나를 본 사람들은 “이주일이다”를 외쳤고 프로그램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에 자극받은 MBC는 나와 친했던 유수열(劉秀烈ㆍ현 여의도클럽 회장) PD를 동원해 전속 제의까지 해왔다.
결국 1981년 1월 MBC ‘웃으면 복이 와요’와 KBS ‘100분 쇼’를 통해 나는 당당하게 TV에 복귀했다.
이렇듯 천당에서 지옥을 오고 간 1980년은 정말 잊지 못할 한 해인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 해 하반기 종합소득세로 1,401만원을 낸 일이다.
물론 연예인 중 1위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세금이라곤 오물세나 주민세밖에 내보지 못한 내가 그런 고액을 냈다는 게 지금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데뷔 초 시청자들에게 말씀 드린 대로 ‘뭔가 보여드린’ 셈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