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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사과가 상처가 될 때

입력
2016.06.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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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서울 구의역 대합실에서 정수영 서울메트로 안전관리본부장이 구의역 사고 원인 및 재발방지대책을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1일 오후 서울 구의역 대합실에서 정수영 서울메트로 안전관리본부장이 구의역 사고 원인 및 재발방지대책을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과’가 넘쳐난다. 사과할 일이 생길 때마다 앞에 나선 책임자는 깊숙이 머리 숙이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지만, 사과할 일이 하루가 멀다고 발생한다. 자주 반복되다 보니 사과하는 태도도 점점 진솔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 기업 기관 PR 담당자들에게는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대중의 불만을 조기에 가라앉히기 위한 대응 매뉴얼이 갖춰져 있는데, 가장 중요한 원칙은 ‘사과는 빠를수록, 높은 사람이 나설수록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사과부터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금일(5.28) 17:57경 2호선 구의역(내선 교대방향) 승강장에서 발생한 사상사고는 119출동하여 조치를 완료하고 18:23분경 열차운행을 재개하였습니다. 열차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서울메트로가 구의역 사고수습 직후 트위터에 올린 사과문이다. 끼니도 제때 못 챙기며 위험한 작업환경에 내몰린 젊은이의 죽음이 ‘조치’라는 말로 대치되며, 그의 죽음을 30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신속히 없던 일로 돌려놓았다는 생색을 담고 있는 이 사죄문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인간화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잘못을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잘못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인간만이 지닌 숭고한 속성인 ‘사과’가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며칠 후 민심이 자신들의 매뉴얼과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서울메트로와 그 책임자 서울시장이 다시 사과에 나섰지만, 한번 상처 난 마음을 없던 거로 돌리기는 힘들어 보인다.

형식적 사과보다 더 상처를 주는 사과는 거짓 사과다. 옥시의 사과가 그렇다. 이 회사 대표는 사태 발생 5년 만에 카메라 앞에 깊숙이 머리 숙이며 “완벽하고 충분한 보상안을 마련하기 위해” 사과가 늦어졌다고 말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분노를 오히려 키웠다. 그 후 수사가 진전되며 사건의 핵심 책임자로 지목되는 옥시 전 대표를 검찰이 소환하자, 싱가포르에 머무는 그는 소환을 거부하며 “업무상 바빠 한국 검찰의 조사에 응할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진정한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노력이 결여된 말 뿐의 사과는 침묵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다.

가장 기가 막힌 경우는 피해자에게 무성의하고 거짓된 사과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경우다. ‘돈보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원한다’는 위안부 피해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위안부피해자재단설립준비위원회부터 꾸리는 우리 정부가 그렇다. 심지어 그 위원장은 “일본이 내놓은 10억엔은 치유금이지 배상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반발이 일자, 말을 바꿨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이 느낀 모욕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 의회는 10억엔이 ‘소녀상 철거 비용’이라는 본심을 숨기지 않으며 “소녀상 철거 없이 돈부터 줄 수 없다”고 오히려 큰소리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 우리 사회에는 가해자가 아니면서도, 피해자의 아픔에 동감해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의미에서 사과에 나서는 이들도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붙은 추모의 글이 그렇다. 경향신문의 분석에 따르면 ‘미안합니다’가 추모의 주요 정서 중 하나다. “아빠로서… 미안합니다.”“너의 죽음이… 침묵했던 내 탓이 있는 것 같아 미안해.” “아무렇지 않게 특권을 누려왔습니다. 우리가 공범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지금부터라도 행동할게요. 미안합니다.” “남자였기에 무지했고 무감했으며 무시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알고 공감하고 행동하며 노력하겠습니다.”

강남역 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를 ‘피해자 코스프레’라고 치부하는 찌질한 남성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피해여성에 연대감을 느끼며 뿌리 깊은 성차별 의식을 반성하는 ‘가해자 코스프레’에 나서는 남성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목격하며, 어처구니없는 사과의 홍수 속에서 다소나마 위안을 얻는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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