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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다 장도리 맞아 숨진 동생… 늙은 형은 아직 보내줄 수 없다

입력
2016.05.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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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가게 뒤 화장실 통로로 침입

피해자 뒤통수 여덟 차례 가격

금반지ㆍ금시곗줄 훔쳐 달아나

계산대ㆍ주머니 현금은 그대로

“가격 횟수 보면 원한살인 가까워”

의문만 남긴 채 8년째 오리무중

사건 다음날 사라진 유력 용의자

작년 10월 극적으로 잡았지만

경찰 피해 다니던 수배자로 판명

발도 용의자 족적보다 훨씬 커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했다. 한 번은 심장이 멈췄을 때,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때. 광주에 사는 최모(76) 할아버지에게 동생(2008년 사망 당시 66세)은 아직 살아있는 존재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뒤 벌써 8년이 흘렀지만 아직 기억 속에 온전히 숨 쉬고 있어서다.

최 할아버지에게 동생은 어릴 때부터 아픈 손가락이었다. 장남인 그에게 늘 양보하며, 방황하기도 했다. 그래도 대견한 동생이었다. 광주 대인동 골목길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남매 셋을 길러낸 동생 내외에게 의사 아들은 어딜 가나 자랑거리였다. 딸 둘도 상경해 번듯한 직장을 다녔다. 형제 간 우애도 깊었다. 최 할아버지에게 동생은 여생을 함께 보낼 유일한 동반자였다.

홀로 잠든 동생 무참히 살해당한 그날 밤

청천벽력 같았던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08년 10월 19일. 광주 동구 대인동 골목의 한 식당에 강도가 들었고, 범인은 식당 주인 최씨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날 오후 10시 50분쯤 식당 앞을 지나가던 이웃 주민이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최씨를 가게 유리창을 통해 목격한 게 마지막 모습이다.

처참하게 살해된 최씨가 발견된 건 이튿날 오전 11시쯤. 결혼한 딸의 이삿짐을 옮기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있던 최씨의 부인은 다음날 아침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자 인근 여관 사장 김모(65)씨에게 남편이 잘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씨가 잠긴 문 틈 사이로 들어갔을 때 식당 방 테이블 옆에 엎드려 누워있던 최씨는 이미 머리에서 피를 흥건히 쏟은 채 숨진 뒤였다. 감식 결과 사망 시간은 19일 오후 11시 30분쯤으로 추정됐다.

범인은 가게 뒤편 화장실 쪽 통로로 침입했다. 식당에 있던 장도리로 최씨의 뒤통수와 오른쪽 귀 부분을 8차례 가격했고, 최씨가 차고 있던 금반지와 금시곗줄(당시 시가 360만원)을 훔쳐 같은 곳을 통해 달아난 것으로 조사됐다. 최씨의 몸에서 반항한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술을 마신 뒤 잠든 최씨는 범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당한 것으로 보였다.

단순 강도라기엔 너무 잔혹한 범행 수법

사건 직후 70여명의 베테랑 형사들이 수사에 뛰어들었다. 2년여의 수사 기간 동안 용의선상에 오른 이만 1,400여명. 사건 당일 현장 주변 기지국 내 착ㆍ발신자, 동일수법 및 유사 수법 전과자 등을 모조리 조사했으나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 수사 결과 일단 돈이 궁했던 누군가가 금품을 노려 저지른 강도 사건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사건 현장은 과거 버스터미널이 위치해 여관과 모텔이 밀집해 있고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사건이 발생한 일요일이면 근처 스크린경마장에 수천명이 모여들기도 했다. 혼자 식당을 지키던 60대 식당 주인이 당장 현금이 급한 강도의 표적이 됐을 개연성도 있다. 장갑을 끼고 들어와 지문 하나 남기지 않은 지능적인 강도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강도 살인 사건으로 단정 짓기에는 석연찮은 구석도 많았다. 사건을 담당한 김창용 광주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형사는 1일 “장도리를 때린 횟수를 보면 원한에 의한 살인에 가깝다. 강도 짓을 하려다 들켜서 저지른 우발 범행이라면 2,3차례만 가격해도 충분한데 범인은 마치 증오했던 사람을 죽이듯 최씨를 처참하게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범인이 식당 계산대를 뒤진 흔적도 없고, 피해자 바지 주머니 현금도 챙겨가지 않았다. 강도로 위장한 원한 살인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그러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 최씨를 살해할 만한 원한과 동기를 가진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범인은 의문만 잔뜩 남긴 채 8년째 잡히지 않고 있다.

7년 쫓은 유력 용의자도 ‘혐의 없음’

2012년 발족한 미제사건팀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자취를 감춘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 나섰다. 사건 당시 식당 건물 여인숙 3층에 살던 김모(63)씨다. 김씨는 2008년까지 6년간 여관에 머무르며 여관 주인 이름을 빌려 치약 거래로 생계를 유지하던 외판원이었다. 미심쩍은 것은 김씨가 신분을 숨기고 살아왔다는 점뿐만 아니라 식당에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그 날로 종적을 감췄다는 점이다.

미제사건팀은 치약 납품을 받으면서 무통장 거래를 했던 전표에서 채취한 지문으로 김씨의 이름을 확인했다. 큰 진전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신원을 특정한 김씨는 주민등록말소자. 게다가 도주한 뒤 7년 동안 통신 기록, 의료 기록이 전무했다. 철저히 숨은 것이다. 형사들의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김씨를 극적으로 잡은 건 지난해 10월. 2013년 5월부터 중요지명피의자 종합 공개수배 1번으로 김씨를 수배한 지 2년 5개월 만이다. 엉켜있던 실타래가 한꺼번에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미제사건팀은 어렵게 잡은 김씨를 하루 만에 석방해야 했다. 김씨가 최씨 살인 사건과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김씨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운영하던 인쇄소가 부도나자 부인에게 강제 이혼을 당했고, 경제사범으로 피소까지 된 상태였다. 김씨는 “수배 중이라 경찰이 날 찾아온 것으로 오해해 달아난 뒤 7년 동안 숨어 지냈다”고 진술했다. 국내 프로파일러 귄위자와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했지만 김씨가 최씨를 죽일만한 동기나 증거를 밝힐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사건 현장에 남아있던 용의자의 족적(250~255㎜)보다 김씨의 발(270)㎜이 훨씬 컸다. 김씨가 일부러 자신의 발보다 더 작은 신발을 신고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적어 보였다.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유력 용의자를 잡기 위한 경찰의 추적도 벽에 막힌 상태다. 그래도 미제사건팀을 찾아온 최 할아버지는 “경찰이 이렇게 공을 들여 범인을 찾고 있을 줄 몰랐다. 꿈에서 동생을 또 만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할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형사는 최 할아버지에게 약속했다. “살인 사건에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동생을 죽인 범인을 꼭 찾을 겁니다.”

광주=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이 기사는 과거 수사 기록, 형사, 유가족의 설명 등을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관련 제보는 광주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062)609-2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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