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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동원의 강제ㆍ폭력성, 총독부가 원했던 그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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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동원의 강제ㆍ폭력성, 총독부가 원했던 그림 아니다”

입력
2018.02.22 19:4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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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활한 전시 총동원 위해

노동 대가 치르려 했지만

숙련공 드물어 결국 탄광 등으로

“인력의 수요ㆍ공급 무능의 문제”

도쿄대 교수의 ‘내부 시각’ 담겨

부산 대연동의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일제의 강제동원은 분명 비정상적인 일이며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민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그 강제동원에서 우리도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뉴시스
부산 대연동의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일제의 강제동원은 분명 비정상적인 일이며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민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그 강제동원에서 우리도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뉴시스

일제시대 조선인의 권익향상을 위해 노력한 기관은 조선총독부다? 피가 꺼꾸로 솟을 얘기다. 그런데 이 진술이 100% 틀렸다라고 하기 어렵다. 여러 이유 중 하나만 꼽자면 관료제의 본질이다. 관료들의 행복은 ‘늘어나는 인원과 조직’, ‘불어나는 권한과 예산’에 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다소 기이하게 들릴지 몰라도 조선의 번영은 조선총독부 관료들에게도 이익이었다.

실제 ‘내선일체’라 말로만 떠들지 말고 조선인을 진짜 일본인처럼 대우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다름 아닌 조선총독부 관료들이었고, 일본 본토 정치인들은 이에 반대하는 논리를 개발하느라 고생깨나 했다는 연구도 있다. 이쯤에서 욕 좀 덜 먹으려면 “총독부가 아무리 그래 봤자 ‘지배-피지배’라는 식민지적 한계는 뚜렷했다”고 한마디 붙여 두는 게 안전하겠다.

도노무라 마사루 도쿄대 교수가 쓴 ‘조선인 강제연행’은 일제 강제동원을 일종의 ‘통치의 합리성’ 차원에서 접근하는 책이다. 일제 식민지배자는 그저 악랄하고 포악한 가해자이어야만 한다는 공식이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 우리에게 제국 내부의 시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저자의 가장 큰 기본 전제는 ‘전시 총동원체제’다. 전쟁은 일단 이겨야 한다. 전쟁의 핵심은 병참ㆍ보급ㆍ군수다. 이를 이뤄 내는 게 국민 총동원 체제다. 총동원 체제는 민중에게 피와 땀을 요구한다. 그 대가는 국민 인증이다. 다름 아닌 보통교육 실시와 참정권 보장 같은 조치들이다. 히틀러, 박정희를 못 잊어 하는 심리도 여기에 있다. 아무 쓸모 없어 보이던 내가 글도 깨치고 기술도 배운 위대한 독일인, 위대한 한국인이 되었다는 인생 서사다.

그렇다면 조선과 만주를 넘어 중국을 침략하고, 동남아로 전선을 확대했으며, 마침내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도 맞붙어 버린 일제는 어땠을까. 조선인의 피와 땀이 절실히 필요했을 게다. 그런데 조선인의 피와 땀을 받아 내려면 그 대가를 내놔야 한다. 민족 감정에 충실하자면 ‘대가를 내놓기 싫으니 만만한 조선사람 그렇게 강제로 끌고 가서 막 부려먹다 버렸겠지’라 말하고 싶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저자의 관점은 이렇다. “일제의 민족차별과 인종적 억압의 가혹함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한편으로선 그것이 동원을 추진한 쪽, 즉 일제의 정책 당국자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일제가 애초부터 조선인들 속이고 등쳐 먹으려고 광분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배자들이 착하고 도덕적이란 얘기가 아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그 어떤 피와 땀 한 방울도 낭비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일제에 이상적인 상황은 피동원자가 동원 현장에서 의욕적으로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것”이다. 동원과 징용 과정에서 생겨나는 여러 잡음은 “오히려 일제의 목표인 전쟁승리를 저해하는 요인”이다.

그렇다면 일제의 의도와 달리 왜 잡음이 일어났을까. 저자는 일본 공식 문서를 읽어나가면서 여러 차원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선 조선인 피와 땀의 농도. 조선인은 문맹률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일본어 가능자도 별로 없었다. 숙련공도 드물었다. 한마디로 일본 공장에 데려다 놓아도 큰 쓸모가 없었다. 피지배자라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으니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다. 민족감정도 문제였다. 일본인과 동일한 대우를 동료 일본인 노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조선인은 점차 일본인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탄광 같은 곳으로 내몰렸다.

대다수 조선인들이 글을 모르니 선전전도 안 먹혀 들었다. 최근 십 수년 간 일제시대에도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있었다는 둥 문화론적 접근이 각광받았지만, 그건 신문이나 잡지를 접할 수 있었던 극히 일부 사람들 얘기일 뿐이다. 공고나 광고를 해봐야 그게 뭔지 알아듣는 이들도 드물었다. 그러니 조선인에겐 일본에 가서 일한다는 건 ‘어느 날 갑자기 돈 벌게 해주겠다면서 강제로 끌고 간 사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조선인 강제연행

도노무라 마사루 지음ㆍ김철 옮김

뿌리와이파리 발행ㆍ280쪽ㆍ1만5,000원

다시 말해 일제의 폭력적인 동원의 가장 큰 원인은, 저자에 따르면 일제의 ‘악’이 아니라 ‘무능’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당시 조선인 가운데 조선에 있어봐야 어차피 먹고사는 게 해결 안 되니 차라리 일본에 가려는 이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일제의 수요와 조선의 공급을 맞추지 못했으니 일제의 실력 부족 아니냐는 얘기다. 여기다 당시 일본 자체가 노동자를 무시하는 경영, 동원 인프라 부족, 수탈 규칙의 결여, 행정력의 부족 등 여러 결점이 있었다. 급한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마구잡이로 동원하고, 그러니 저항은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는 얘기다.

여기서 결정타. 그래, 만만한 조선놈들 막 부려먹었으니 일본 사람들은 배 두들기며 편히 지냈을까. 아니다. “오히려 조선인의 존재로 인해 일본 민중에 대한 억압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조선인 노동자를 불리한 조건에서 일하게 하는 관행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함으로써 일본인 노동자의 대우도 개선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소수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강요하는 국가와 사회는 다수자도 억압한다”라고 못 박는다.

이런 결론은 저자의 연구목적, 곧 조선인 강제동원을 통해 오늘날 일본 내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짚어 보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일제의 강제동원에 비분강개해야 하겠지만, 이제 ‘사장 노릇’ 어지간히 해본 한국인들도 조선인 강제동원에서 조금 다른 교훈을 얻어 낼 때도 되지 않았을까.

번역자가 후기를 통해 식민통치의 주체(subject)도 대상(object)도 아닌, ‘비체(卑體ㆍabject)’로서의 식민지 조선인을 조명하는 대목 또한 꼭 한번 읽어 볼 만하다. 회색지대에 주목한다는 이유로 흑백 양 진영에서 오랫동안 욕 먹어 온 번역자의 울분이, 미안하지만 재미있게 녹아 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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