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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용서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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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용서의 조건

입력
2017.03.2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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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에서 영국군이 가톨릭교도에 발포해 14명이 숨졌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당시 열 살이던 리처드 무어는 시위 과정에서 두 눈을 잃었다. 그는 자신을 쏜 영국군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를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했어요.” 종교는 ‘무조건적 용서’를 권한다.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고 했던 예수가 대표적이다. 티베트 종교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미움은 강인함이 아닌 나약함의 다른 모습이다. 미움이나 분노를 통해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며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을 용서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여론조사에선 국민 28%가 불구속을 바란다. 주동은 옛 새누리당 정치인과 일부 보수언론이다. 박근혜 정권 만들기에 앞장섰고 편가르기와 증오를 부추겼던 세력이다.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인 김관용 경북지사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국민들이 좀 용서해주자”고 했고,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국가지도자였던 품위 등을 생각해 재판 받을 때까지 불구속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보수지는 박 전 대통령을 구속시키는 것은 수치스럽고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 2년 전 임신한 아내에게 줄 크림빵을 사 들고 집에 가던 예비아빠가 뺑소니 차에 치여 숨졌다. 피해자 부친은 19일 만에 자수한 가해자를 용서했다. 그의 진정성을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해자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마지못해 자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서도 변명으로 일관했다. 피해자 부친은 용서를 번복했다. 그에겐 ‘진정한 뉘우침’이 용서의 전제조건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장 켈레비치는 홀로코스트를 두고 “용서란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했다. 인간의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와 반성과 처벌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개인 관계에서 폭력과 증오는 일상적이다. 용서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용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실수로 저지른 잘못과 권력자가 악의를 갖고 국민에게 피해를 준 범죄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용서하기 힘든 일도 용서하는, 무조건적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 박 전 대통령이 진실의 뒤로 숨으며 검찰에 출두한 다음날 세월호가 올라왔다. 용서란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외면하고 기억에서 지우길 강요하는 용서는 무책임하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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